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선시 (문단 편집) === [[일본 제국|일제]]의 몰락, 그리고 [[북한]] 치하 === 그러나 [[일본 제국|일제]]는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겪으며 사정상 나진 개발을 등한시하게 되었고 따라서 나진의 발전이 지지부진해졌다. 나진이 인구 30~40만명의 대도시로 성장하리라는 예측과 다르게 나진의 인구는 1944년 기준 34,390명에 불과하여 [[함경북도]]에서 제일 큰 도시 [[청진시|청진]][* 청진은 1938년에 [[미쓰비시 그룹|미쓰비시]]에서 [[김책제철연합기업소|청진제철소]]를 세우고 1940년에 함경북도청이 있는 [[경성군]]의 [[라남구역|나남읍]]을 꿀꺽(...)하여 당시 조선 전체에서도 손 꼽히는 대도시로 발전했다.]은 물론이고 인근의 [[아오지 탄광|아오지읍]](1943년 기준 49,105명)[* 아오지는 [[갈탄]] 지대로 [[일본 제국|일제]]에 의해 탄광이 개발되고 석탄 액화 공장이 건설되어 인조 석유를 만드는 공업 지구로 개발되어 크게 성장했다.]보다도 적은 수준에 그쳤다. 결국 일제가 패망한 뒤 [[북한]] 정권이 수립되고 나진청 계획이 끊어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라선은 이전처럼 그저 변방의 작은 항구에 지나지 않는 곳이 되었다. 결국 1949년에 라진'''[[군(행정구역)/대한민국|군]]'''으로 격하되었다. 이때 라진군에 [[경흥군]]의 풍해면과 [[부령군]]의 관해면, 삼해면, 부거면, 연천면을 편입했다. 그러나 종단항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는 대신 북한에서 유일하게 [[소련]]과 붙은 곳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대(對) 소련 관문 역할을 맡게 되었다. 실제로 [[소련군]]이 당시 조선에서 제일 먼저 상륙한 곳이 라선 지역이다.[* 소련군의 함대가 제일 먼저 웅기항으로 진입했기 때문. 그래서 제일 먼저 일제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렇게 라선은 만주 동북 3성과의 교류가 소원해진 대신 소련과의 교류 지역으로 각광을 받으면서 무려 [[6.25 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2년에 [[두만강철교]](現 [[문화어]]: [[북한|조선]]-[[러시아|로씨야]] 우정의 다리)[* 처음에는 나무다리로 개통했고 이후 개조했다. 현재도 [[북한]]과 [[러시아]]를 잇는 유일한 육로다.]가 개통되었다.[* 다만 나진, 웅기, 경흥은 한 번도 [[대한민국 국군]]이나 유엔군에 점령되지 않았기에 전란의 피해를 별로 입지 않았고 소련은 상대적으로 전쟁에 소극적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1952년에 [[선봉구역]] 일대에 웅기군을 신설했다. 소련과 철도가 연결되어 소련에서 라진항과 웅기항을 이용하는 대신 소련의 지원으로 [[승리화학연합기업소]]와 화력발전소가 세워지기도 했다. 그렇게 다시금 발전하게 되어 1967년에 라진군을 라진시로 승격시켰다. 이때 웅기군을 편입하였고 부거면, 연천면을 [[청진시]]에 이관하였다. 그리고 이내 다시 웅기군을 분할했다. 1973년 8월에는 라진시에 남산구역, 신흥구역, 관해구역 등 3개 구역을 신설하였다. 그러나 1년도 지나지 않은 1974년 5월 도로 폐지되었다. 1981년 10월에 웅기군을 선봉군([[선봉지구]])[* 위에서 언급했듯 소련군이 제일 먼저(先) 상륙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명칭.] 으로 개칭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