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선시 (문단 편집) === 종단항(終端港) 개발 === [Include(틀:일제강점기의 부)] [[일본 제국|일제]]는 만주의 물자를 [[일본]] 본토로 실어나를 수 있을 항구를 찾았다. [[https://shindonga.donga.com/Library/3/02/13/105827/2|기존에 일제는 만주에서 일본 본토까지 크게 3가지 경로를 이용하여 화물을 운송했다.]] 첫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해]]를 통해 일본으로 이어지는 동해항로. 거리가 짧다는 장점이 있지만 [[러시아 제국]], [[소련]]의 영토인 탓에 일제의 통제 밖에 있었다는 점과 [[블라디보스토크]] 해안 일대가 겨울에 곧잘 언다는 단점이 있었다.[* 현재도 아무르스키 만 일대는 겨울에 곧잘 얼며 [[쇄빙선]]을 이용하여 항구를 운영하고 있다.] 둘째는 [[경의선]], [[경부선]]으로 [[부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이어지는 조선철도. 당시 일제의 영역 내에 있어 운영이 자유로웠지만 운송 비용이 많이 든다는 단점이 있었다.[* 현재에도 대규모의 물류 운송은 해상 운송이 육상 운송에 비해 압도적으로 경제적이다.] 셋째는 [[다롄시|다롄]]에서 [[황해]]를 거쳐 일본으로 이어지는 황해항로. 비록 거리상으로 멀지만 일제의 영역이면서 해상 운송이기 때문에 일제가 주로 이용한 경로였다. 그러다가 [[일본 제국|일제]]는 만주를 완전히 차지할 계획을 세우며[* 결국 일제는 [[만주사변]] 뒤 [[만주국]]을 세워 만주를 손에 넣었다.] 만주의 물자들을 최대한 경제적으로 운송할 수 있을 종단항(終端港)을 찾았다. 처음에는 [[청진항]]과 웅기항이 많이 거론되었지만 그 두 항구들은 각각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청진시|청진]]은 당시 [[함경북도]]에서 제일가는 [[항구도시]]였고 종단항으로 제일 많이 거론되는 곳이었다. 그러나 청진은 애초에 만(灣)이 발달하지 않았고 [[청진항]]의 규모가 매우 작다는 단점이 있었다. 주로 어항(漁港)으로 이용하기에 적당했지만 [[함경북도]]의 목재들을 운반하기에도 버거웠으니 만주의 어마어마한 물자를 실어나르기에 [[청진항]]의 규모는 너무 작았다. 웅기항은 1921년에 개항된 항구로서 주로 군항(軍港)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웅기만 자체는 만(灣)이 발달했으나 항구가 작고 남동쪽으로 뚫려 파도의 영향을 받기 쉽다는 단점이 있었다. 일제는 결국 청진과 웅기가 아닌 제 3의 지역 [[경흥군]] 신안면(新安面, 현 [[라진구역]])[* 1969년에 출범한 [[전라남도]] [[신안군]]과 음, 한자 모두 같다.] 나진(羅津)을 주목했다. 나진만은 항만 자체가 매우 넓고[* 나진(羅津)이라는 이름은 벌처럼 넓은 나루라는 뜻의 벌나루를 한자로 나타낸 것이다.] 나진반도와 대초도, 소초도가 천연 방파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대형 항구로 개발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은 한반도 최북단에 있는 항구였고, 여기서 아주 조금만 더 올라가면 바다가 얼어버리는 극지방 기후가 시작되었다. 극동 최북단의 [[부동항]]이라는 점은 정치,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일제는 신안면(나진)을 대륙 진출의 거점으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나진의 인구가 급속도로 늘어나고 땅값이 급속도로 치솟자[* 한국 역사상 최초로 부동산 투기 열풍이 일어났다.] 조선시가지계획령을 발표하여 나진 시가지 개발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1934년 나진읍으로, 다시 '''2년 만인''' 1936년 나진부로 초고속 승격되어 경흥군에서 분리되었다. 게다가 1930년대 후반 일제가 나진부와 경흥군 [[선봉구역|웅기읍]]을 [[함경북도]]에서 독립시켜 [[조선총독부]] 직할의 '''나진청'''(羅津廳)으로 만들려고 했던 구상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뒷날 [[북한]] 정권이 [[라진구역|라진]]과 [[선봉구역|선봉]]을 합쳐 라진선봉시로 출범되었고 현재의 라선시로 이어지게 된다.] 1939년 7월 1일에 발족시킬 예정이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흐지부지되었다. 이 계획이 실현되었으면, 경흥군은 해체되고, 예하 행정구역인 상하면(이후 아오지읍), 경흥면, 노서면은 [[경원군]]으로, 풍해면은 [[부령군]]으로 편입됐을 것이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9060100209202020&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9-06-01&officeId=00020&pageNo=2&printNo=6385&publishType=00020|#]] 일제는 이미 이 당시에 나진의 가능성을 알아봤던 것이다.[* 실제로도 만주국 건국 이후 대륙 종단 철도의 종착지가 바로 나선이었다.] 그렇게 나진은 [[일본 제국|일제]]의 대륙 진출의 교두보 역할을 맡으며 꾸준히 성장하여 인구 30~40만명 가량의 대도시로 성장하리라는 기대감에 부풀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