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면 (문단 편집) === 한국의 라면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Y0gPvWJRIbU)]}}}|| 한국의 인스턴트 라면은 위의 인스턴트 라멘이 바탕이 된다. 1963년 9월 15일에 [[삼양라면]]을 원조로 하여 인스턴트 라면이 처음으로 출시되었다. 1950년대 말 보험 회사를 운영했던 [[전중윤]] 삼양식품 회장은 [[일본]]에서 경영 연수를 했을 적에 접했던 인스턴트 라면이 당시 경제가 어려워 먹을 것이 없는 한국 사정에 맞을 것 같아 들여왔다.[* 약 한 달에 걸쳐 라면 개발자 [[안도 모모후쿠]] 및 그의 회사인 닛신식품과 접촉했지만 요지부동으로 제조법을 알려주지 않아서 대신 닛신식품의 라이벌인 [[묘조식품]](明星食品)과 접촉하여 회사의 라면 제조공장 설비 2기를 사들이는 조건으로 라면 제조법을 무상으로 얻을 수 있었다. 이때의 에피소드가 당시 면 제조법은 아무 문제 없이 얻을 수 있었으나 스프 제조법은 묘조식품 사장 오쿠이 기요스미의 찬성에도 불구하고 회사 임원들의 반대로 무산될 뻔했다고. 해서 그냥 돌아가려고 공항에서 기다리던 중 오쿠이 사장이 스프 제조법이 적힌 노트를 보내주어 들여올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출시했던 제품은 맛이 한국인의 입맛에 그다지 잘 맞지 않아 별 인기가 없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삼양이 출시한 라면은 일본의 묘조(明星-명성)식품의 제조법을 그대로 가져온 일본식 치킨라면이었고. 이 때문에 닭고기 국물을 재현한 수프라서 느끼한 맛이 났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던 [[삼양식품]]은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회사 내에 스프 관련 실험실을 설치하는 한편 종로 거리에서 공개 시식회를 하는 등 화제를 모았고, [[청와대]]까지 가서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에게 라면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때 라면을 처음 먹은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 한국인들은 맵고 짭짤한 맛을 좋아하니 [[고춧가루]]가 좀 더 들어갔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그리하여 한국의 라면은 기본적으로 매운맛을 가미하게 되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a.goo.ne.jp/151030_s154.jpg|width=100%]]}}}|| || ▲1960년대 삼양라면의 원조 격인 묘조라멘의 신문 광고 || 당시 가격은 10원. [[김치찌개]] 백반이 30원, [[짜장면]]이 20원이었던 시절이니 굳이 지금 물가로 치면 2~3천 원꼴로, 대다수가 빈곤층이었던 당시에는 상당히 고가의 먹거리였다. 더군다나 가난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라면의 대중화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60년대 유년기를 보낸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라면은 콜라처럼 손님이 와야 대접하는 음식이었다고 하니 초반에는 그렇게 수요가 크진 않았다. [[검정고무신]]에서도 이점을 충실히 반영하여, 라면이 당시 서민들에게 고급(?) 음식이었다는 점이 잘 드러난다. 열악했던 60년대에는 라면이 [[짜장면]]과 맞먹는 상당한 고급 음식이었으며, 부잣집 사람들이 아닌 이상은 특별한 날에만 겨우 맛볼 수 있는 귀한 음식이라는 인식이었다.[* 라면 관련 에피소드 중에는 부자 친척이 놀러와서 준 10원으로 라면을 산 이기철, 이기영 형제 중 기철은 혼자 몰래 먹으려고 어딘가로 갔으며, 기영은 친구들과 먹으려다 길을 가다 배고파 쓰러진 할아버지에게 대접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가 라면을 만드는 회사 사장님이라서 그 보답으로 라면을 잔뜩 보내줬고, 가족들은 동네 사람들을 모두 불러 잔치를 연다. 기철이는 한편 몰래 라면을 먹으려다 마침 나타난 [[거지 형제]]가 라면을 먹튀해 버리고 만다.] 70년대 말까지는 도시에도 국수 공장이 있는 동네가 많았고, 국수가 라면보다 훨씬 저렴했다. 그 때문에 짱뚱이 만화를 보면 저녁 때 어머니가 라면을 내놓았더니 아이들이 무척 좋아하는 내용이 나오고 라면이 비싸서 국수를 섞는 것을 보고 주인공이 싫어하는 내용도 함께 나온다. 그러나 점차 수요가 커지면서 1960년대 중후반 들어서 수많은 회사들이 라면을 만들기 시작했다가, 1970년대가 다가올 무렵에 삼양과 롯데(농심)만이 살아남았다. 삼양이 받은 국가 차원의 지원은 한국 라면의 상징이 되었다. 당시에는 국가적으로 미국에서 수입된 [[밀가루]]를 소비하기 위해 혼분식을 장려했었기 때문이다.[* 라면과 같은 면종류 외에도 제빵, 제과와 같은 곳에도 쓰이게 된다.] 이후 [[쇠고기]] 육수 맛을 베이스로 해서 [[한국 요리|한식]]의 전반적인 경향에 따라 매운맛을 조금씩 넣다가, 특히 [[농심그룹]]의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 라면인 '[[신라면]]'이 나온 [[1986년]] 이후로는 매운 라면이 특히 더 인기를 끌었다. 신라면 이전에도 매운맛을 내는 라면들이 농심과 삼양에서 나오긴 했지만 신라면처럼 전략적인 상품으로 나온 건 아니었으며 매운 정도도 신라면에 비하면 다소 낮은 편이었다.[* 신라면 출시 이전 한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라면은 같은 농심에서 생산한 [[안성탕면]]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