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똥군기/사례 (문단 편집) ==== 감영, 관아 ==== [[감영]]이나 [[관아]] 등 지방 관직 관료들도 군기 잡기가 심한 편이었으며 탐관오리이거나 텃세부림이 심할수록 휘하 관료들(이방 및 육방관속)이나 [[포졸]]들에 대한 군기 잡기가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특히 지방 감영이나 관아로 갈수록 그 텃세부림이 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에 비해서 한성과 지방간의 인적교류가 매우 드물었고 교통수단이나 통신수단도 없으며 지방에서는 감영의 관찰사(영감)이나 고을의 원(사또)이 사실상 지방의 왕이었기 때문에 육방관속들이나 포졸들 군기잡기에는 아주 좋은 조건을 가질만도 했다.[* 고려 시대까지는 아직까지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지배력이 완전하지 않아서 향리들의 권력이 강했기 때문에 관찰사나 원들이 똥군기를 부리는 일은 적었다. 대신 이 시기에는 반대로 향리들이 현지 사정을 잘 아는 것을 이용해 갓 부임한 관찰사나 원을 상대로 하극상 수준의 똥군기를 부렸다. 이러한 지방관에 대한 향리들의 똥군기는 조선시대에 향, 부곡, 소 가 현으로 승격되고 팔도의 모든 곳에 지방관을 파견하게 되고, 수령의 권력을 강화시켜주고 향리들을 아전으로 격하시키고 난 후에야 사라졌다.] 청백리급이라면 군기가 덜할 수 있으나 탐관오리일수록 육방관속들을 넘어서 심지어는 지방 백성들까지 군기잡기를 해대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역관광으로 재밌는 얘기가 하나 있다. 삼정의 문란으로 기강이 해이해지고 수탈이 심해지던 조선 말기, 오씨 성 가진 수령이 부임해 가렴주구에 열심이였다. 특히 휘하에 관속들에게도 더 쥐어짜내라고 온갖 똥군기와 갈굼을 일삼았다. 견디지 못한 관속들이 서로 짜고 방자 하나를 시켜 사또의 뺨을 갈기게 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진 사또가 그 방자를 죽이라고 길길이 날뛰었으나 이미 입을 맞춘 관속들이 발뺌을 하고 모르쇠로 일관했다. 결국 사또가 미쳤다고 소문이 나 그 사또는 자리에서 잘렸고 조정에서도 정신병자로 여겨 관직운이 끊겼다. 이 사또는 물러나서도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했으나 상식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리가 없어 가족, 친척, 친구들 모두 그를 미치광이 취급했다. 늘그막이 돼서야 그날 일을 슬쩍 언급하며 관속들이 짜고 자신을 내쫒았다고 말하는 순간, 그간 시달렸던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주위의 반응에 사또는 진저리가 나 죽을 때까지 이 일을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 또한 삼권분립이 되지 못했던 시절이라 이 당시까지는 고을의 감영 영감이나 원이 사실상 그 지방의 행정사무, 법무, 의무, 농무, 병무, 상무의 총책임을 모두 쥐고있는 시절이기도 하여서 이를 오용하여 탐관오리들도 많았던 편이다. 오늘날 재판소 판결의 역할도 그 당시에는 감영 영감이나 고을의 원이 모두 판결하였다. 다만, 전근대같은 사회상이나 '''조선시대'''였다는 상황 자체를 반영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는 양인제라는 '''신분제'''가 법적으로 지정되어 있었고, 지방관같은 경우 거의 다 양반이었고 육방은 중인, 포졸이나 기타 관련자는 평민 또는 천민이었기 때문에 똥군기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사또가 똥군기를 부려도 "나는 왕의 임명을 받은 대리인이다!", 또는 "상놈 주제에!"라고 말하는 순간 그 밑의 사람들은 모두 떼꿀멍할 수밖에 없던 시대였다. 역사적으로도 강상죄나 중대한 비리를 저질러 처벌받은 수령은 많아도, 똥군기를 잡아서 파면되거나 벌받은 수령은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