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딩모춘 (문단 편집) === 한간의 길 === 하지만 한간 [[리스췬]]과 대본영 특무부장 [[도이하라 겐지]]의 포섭으로 국민정부를 버리고 상하이로 떠나버렸다. 이후 [[일본 제국]]에 투항하여 [[중화민국 유신정부]]에 합류, 리스췬과 함께 괴뢰 특무기관인 "76호"를 조직하여 충칭으로 피난간 국민정부의 군통과 대결했다. 이로 인하여 [[저우포하이]]의 신임을 받았으나 상하이의 도살자, 권총왕, 암살왕, 살인마, [[왕징웨이]]의 [[하인리히 힘러|힘러]] 등의 악명을 얻게 되었다. 이런 이력으로 국민정부의 분노를 사게 되어 수차례 그를 암살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1939년에 발생한 [[시베리아 모피점 사건]]이다. 이때 딩모춘은 특유의 기민함으로 살아남았으며 자신을 죽이려 한 [[정핑루]]를 살려주었으나 아내 자오후이민의 반발로 결국 1940년에 그녀를 처형했다. 이때 76호 내부의 정적들로부터 처신을 잘못했다는 비난을 받고 76호에서 축출되었다. 허나 1940년 3월, 왕징웨이의 괴뢰 난징 국민정부 수립과 함께 중앙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초빙되어 왕징웨이 정권이 붕괴되는 순간까지 재직했고 군사위원회 위원, 행정원 사회부장을 거쳐 1941년 8월 교통부장, 1943년 사회복지부장, 1945년 5월 절강성장, 절강성 보안사령관, 절강성 당부주임, 항주 수정공서 주임으로 임명되는 등 고위직을 역임했다. 그러나 중일전쟁 말기에 일본의 패망이 가시화되자 [[천리푸]]와 접촉하여 다시 국민정부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국민정부는 공산군이 상하이와 난징을 장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딩모춘을 절강성장에 재임명하였다. 하지만 국민정부가 신속히 왕징웨이 정권의 잔재를 제거하면서 곧 국민정부가 파견한 관료들에게 자리를 내주었으며 1945년 9월, 육군총사령관 [[허잉친]]이 한간 체포령을 하달함에 따라 '죄질이 중대한 자'로 분류되어 체포되었다. 초기에는 한간을 활용하고자 했던 [[다이리]]의 계획으로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으나 1946년 다이리가 비행기 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한간을 처벌하자는 숙간운동이 벌어지면서 재판정에 서게 되었다. 악명높은 그의 재판을 보기 위해 수백명의 사람이 운집했고 딩모춘은 자신이 공산주의에 대항하였으며 친일도 민중을 위해 부득이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반공은 본인의 평생 숙원이다. 비록 괴뢰 측에 있었지만 반공 공작을 적극 책동하면서 조금도 긴장을 놓지 않았다. 또한 본인이 전후에 맡은 괴뢰 직은 모두 사회와 민중에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이에 힘을 기울여 공산당의 활동이 동남지역에서 발전할 수 없게 하였다. 일본의 투항 이전에 공산당은 동남에서 비록 군중을 쟁취하고자 노력했지만 효과가 없었으니 본인의 노력이 결코 헛된 것은 아니었고 본인의 부하들도 이에 대해 많은 협조를 하였다." 또한 딩모춘은 자신이 76호의 책임자로 있는 동안 국민당의 군통 요원들을 도와주고 비밀리에 석방시키기도 했다면서 자신이 항일을 오히려 도왔다고 주장했다. 저우포하이처럼 딩모춘은 일제 패망 이전에 국민정부의 이중간첩으로 활동한 정황이 있었고 실제로 반공을 하여 공산당의 활동을 억제한 공이 있었기 때문에 국민정부 축은 딩모춘을 일단 살려두기로 결정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