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디오클레티아누스 (문단 편집) ==== 내정 및 정치개혁 ====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종심방어체제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일단 민정과 군정을 분리시킨다. 이후 그는 체계적인 관직제도를 구축하는데, 그 세부적인 사항은 다음과 같다. * 황제와 부제가 정점에 서고, 그 밑으로 각 황제들의 관할구를 크게 나누어 4개의 "대관구"(Praefectura Praetorio)와 12개의 "관구"(Diocese)를 두고, 관구의 장을 신설한다. (일명 대리인 = 비카리우스Vicarius) 그 밑으로 110개 속주(province)의 장들이 위치하며, 이전의 대대장이었던 [[트리부누스 밀리툼]]은 이들과의 위계 체제에서 동급 혹 밑에 서면서 이들과 같은 체계 안에 편입된다. 프라이펙투스 같은 경우엔 중요 대도시를 담당하면서 일부는 비카리우스와 대등한 위치에도 섰고, 일부는 군권을 계속 쥐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대표적인 경우가 프라이펙투스 프라토리오(로마 근위대 대장). 이때까진 계속 근위대에 대한 군 통수권을 쥐고 비카리우스나 군 통수권을 쥔 둑스보다도 권한이 높았다.) * 이전엔 군단들 여럿을 지휘하던 군사령관인 둑스는 이때부터 단일 군단을 지휘하는 군단장의 호칭이 된다. 이들 위에 이들을 통솔하는 코메스가 존재한다. 이런 식으로 이전과는 다른 좀 더 체계적인 제도를 구축한다. 이것이 후기 로마제국 관료제의 시초가 된다. 입법기능에도 관심을 가져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원로원의 입법기능을 박탈한다. 그는 집정관을 자신이 임명하도록 하고 법안을 원로원 의결이 아닌 황제의 칙령으로 바꾸면서 이를 보좌할 관료제도를 도입하였다. 이로서 행정업무는 전문화되고 체계화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관료의 숫자 증가, 속주와 총독 수 증가에 따른 막대한 재정 팽창, 군대 규모의 확대와 법제화된 황실행정 등장에 따른 재정 고갈 위기 등은 그렇지 않아도 로마 제국의 방대한 민간 관료 체계 등장으로 살림살이가 많아진 로마 제국의 재정에 악영향을 발생시켰다. 설상가상 행정제도 확립과 관료제 도입, 군사제도 개편 등으로 인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던 중,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도미나투스 선전과 황제권 강화 등을 이유로 거의 모든 속주와 군사시설, 제국에 새롭게 설치될 황제가 머물 4개 도시의 화려한 궁전 및 각종 시설 건립과 대규모 리모델링으로 재정 긴장을 초래할 정도로 많은 돈을 일시금 가깝게 소비했다. 이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신의 사업들과 야심차게 밀어붙인 대대적인 개혁을 위해, 로마 제국 전체의 화폐 및 재정 체계 재편을 목적으로 286년 화폐개혁을 단행한다. 단,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화폐개혁은 본인의 실책을 가리기 위해 벌인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오현제]] 치세부터 시작된 로마 제국의 재정 혼돈과 끝없는 재정 긴장 위험도를 종식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고, 실제 그는 금과 은의 새로운 화폐 체계를 장기적 관점으로 만들어 정착케하려고 노력했다. 이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기존의 아우레우스 금화를 새로운 아우레우스로 한 금화로 대체시킨다. 이는 표준금화의 금 1파운드의 60%에 해당된 새로운 아우레우스였다. 아울러 표준 은화 1판운드의 96% 비율의 새로운 은화 '아르겐테우스'도 발행한다. 아르겐테우스는 대략 [[네로]] 시대의 데나리우스와 비슷한 새로운 은화였다. 여기에 더해 그는 소액 주화의 필요성이 급증하는 로마 사회를 위해, 3가지의 은 도금 청동주화들을 발행시킨다. 이는 '폴리스'로 알려진 주화인데, 가장 가벼운 것이 은이 도금된 데나리우스로 이 화폐는 대략 1/20 폴리스 정도였다. 그가 취한 화폐개혁은 익히 알려졌듯, 성공도 실패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근간이 된 아우레우스는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 아래에서 무게가 준 솔리두스로 바뀌었고, 이는 이후의 [[동로마 제국]]과 중세 유럽 사회에도 천년 이상 수명을 유지한 화폐 중 하나가 됐다[* 이탈리아의 솔도, 프랑스의 수가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의 아우레우스&솔리두스의 영향 아래 유지된 화폐들이었다.]. 하지만 단기적으로 봤을 때, 기축통화인 데나리우스 은화를 폐지하고 새로운 은화와 동화를 발행, 인플레이션을 잡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그는 [[301년]] 가격통제칙령을 공포하고 모든 물품과 용역의 상한선을 정해 이를 어길 경우 엄벌에 처한다는 제도를 도입한다. 이것은 인류역사상 최초의 가격통제제도로 보인다. 여기에 군인 충당을 목적으로 직업세습제까지 시행하나 이건 재능의 문제라 얼마 가지 않아 사문화되었다.[* 단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에는 엄격하게 수행된 것 같다. 실제로 퇴역군인 아버지를 둔 그리스도교도 청년 [[테베스테]] (현재 알제리의 [[테베사]])의 막시밀리아누스가 296년에 현역판정을 받고도 우상숭배를 금하는 그리스도교 교리를 근거로 입대를 거부한 죄로 사형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막시밀리아누스는 훗날 성인으로 시성되어 '테베스테의 성 막시밀리아누스(막시밀리아노)'로 불린다.] 이 가격통제칙령이 마치 실패라도 한 것처럼 로마인 이야기를 비롯한 옛날 서적들은 묘사하고 있지만 이것도 사실 이미 90년대에 타파되어 극복된 학설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가격통제칙령은 반포하기 전에 각계각층 전문가와 조사관을 통해 면밀한 검토를 거쳤고, 실제 시중에서 통용되는 가격보다 2~3배인 경우도 있었으며 늘 높았고 어디까지나 상한이었다. 게다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가격통제령에서 상인들의 탐욕에 대해 도덕적으로 질타하는 부분을 마치 그가 경제원리를 제대로 이해못하고 한 말인 것처럼 잘못 이해되고 있는데, 당시의 로마 제국은 대한민국처럼 공정거래처가 있지 않았기 때문에 상인들이 대단히 위급한 상황에서도 매점매석을 자행하고 소상공인들을 폭리로 괴롭히는 일이 잦았다. 이 가격통제령은 적어도 307년까진 기능을 잘 발휘했으며, 유명무실하게 된 후에도 율리아누스 또한 안티오키아의 매점매석 현상 및 그로 인한 경제위기를 해소하고자 재발굴하여 일시적으로 활용할 정도로 유효했던 정책이었다. 이렇게 그는 화폐개혁을 단행해 이를 장기적으로 정착시키면서 재정 긴장 상태 만성화 방지를 위해, 세금제도에도 손을 댄다. 이는 [[3세기의 위기]]동안 난립하는 임시세를 깨끗하게 정리하고, 불규칙적인 긴급 세금과 강제 청구 제도를 폐지하는 조치와 함께 진행됐다. 그러나 3세기 난립한 여러 강제 세금 징수제를 폐지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국가 재정을 만성적 긴장 상태로 몰아넣을 위험성이 높아, 이 조치와 함께 새로운 세제 개혁 아래 생산물에 정규적 소득세를 대체 부과하는 신설 부과세가 도입된다. 아울러 '''이탈리아를 포함한'''[* 종전에는 카라칼라의 시민권 칙령이 있긴 했지만 여전히 본국으로서 면세지역이었다. 이탈리아는 세금을 징수하는 대상이 아니라 세금을 수취하는 주체였다고 보면 된다.] 제국 전역에 새로운 세금제도의 제정까지 발표되고 시행된다. 이때부터 이탈리아는 본국의 특권을 잃고 일반 속주와 동등해지게 되었다.[* 다만 로마 시는 여전히 면세였다. 그리고 이탈리아 내에서도 남이탈리아에 대한 세금이 좀 더 낮았는데, 그 이유는 거기에 원로원 귀족들의 부동산이 매우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 제도의 특징은 아래와 같다. * 필요한 재정의 액수를 황제가 1년에 한 번씩 결정한다. 즉, 국가의 필요에 따라서 세액을 결정한다. * 결정된 세액은 실질적인 수익과 관계없이 납세자에게 부과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개인 사정 따위는 감안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모든 세무는 중앙정부가 통합 관할한다. 이로써 지방자치단체는 독자적인 재정을 사실상 보유할 수 없게 된다. * 세금은 크게 농경지에 부과하는 '토지세'(jugatio)와 사람에게 부과하는 '인두세'(capitatio)로 이분화하며, 구체적인 액수는 5년에 한 번씩 사정한다. 즉, 일단 결정된 세금은 5년 후에나 세금액이 재결정된다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볼 때 흉년이 찾아와도 세금은 FM대로 거두다 보니까 납세자들 입장에서는 고문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국가의 예산이 어느 정도일지에 대해 예상 가능하며, 고정적인 수입이 들어올 것을 예측가능하게 하므로 높으신 분들이 사치와 향락을 위해 고액의 세금을 내라고 강요하거나 비상식적인 복지체제를 구축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서는 세금 및 국채 발행의 남발을 막고 체계적인 세제를 수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디오클레티아누스 이전에는 임시세를 전쟁을 직접 수행하던 속주에 부과할 때가 잦았다. 즉 납세 자체가 대단히 불공평하게 되고 있었다는 것으로 내내 로마 제국 인민이 문제삼던 부분이었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전쟁을 상시로 하지 않는 평온한 내부 속주들에게 제국 방어 비용을 균등히 부담시킨 것이다. 그의 업적 중 '황제'의 위상을 과시하고, 신성화하기 시작하는데 황제의 명칭에 도미누스(Dominus)를 썼던 게 있는데, 사실 황제가 도미누스 호칭을 대놓고 쓰기 시작한 건 아우렐리아누스가 처음이었다. 다만 아우렐리아누스는 본격적인 내정 개혁을 시도하기 전에 죽어 거기서 그쳤을 뿐. 다만 법제에 정식으로 이 호칭을 도입하고, 페르시아식 궁정 의식을 도입한 건 디오클레티아누스였으니 의의를 낮춰볼 순 없다. 해서 이로 인해 동방 일대에서 로마 황제는 '''[[바실레우스]](Βασιλεύς)'''[* "왕"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이며 로마 제국 동방에서 이미 1~2세기부터 로마의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란 호칭으로 더욱 많이 불리기 시작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제도개혁은 좀 더 많은 세율을 좀 더 효율적으로 많이 걷고 운용 또한 효율성을 극대화하고자 함을 알 수 있다. 과도한 세금을 내지 못한 많은 중소 자영농들이 토지를 버리고 도망가거나 소작인으로 몰락하는 등 부작용이 굉장히 컸다고 하지만 이는 말기 로마 제국의 전반적인 경향을 말한 것이지 디오클레티아누스 때 일어난 일로 퉁칠 수 없는 현상이며, 디오클레티아누스 개혁 전의 세금이 오히려 대단히 자의적이었던데다 예고 없이 마구 징발되는 때도 잦고 원칙도 없어 납세자들 입장에선 더 견디기 힘들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