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디오클레티아누스 (문단 편집) ==== 최초의 분할통치([[사두정치]])([[293년]]) ==== 가장 상징적인 것 중 하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의 권위를 높이는 것만으로는 단독으로 제국 방어를 수행하는 것은 어렵다고 보고 이를 넷으로 늘린다. 사실 로마 제국에서 '공동 황제' 체제는 이전에도 자주 있었던 일이지만, 이전에는 '후계자 지명' 혹은 임의적인 체계였던 반면 사두정치 제도는 상설화되고 체계적인 제도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동방 정제와 서방 정제를 하나씩 두고 그 아래 동방 부제와 서방 부제를 임명, 각자 맡은 관할구역에서 군사 분야에 대부분의 권한을 가지고(부제는 상대적으로 권한이 딸린다.) 방어에 임한다고 보면 타당하다. 또한 두 정제는 일정기간 이후 은퇴하며 두 부제가 정제 직위로 올라가 새로운 부제를 임명하는 방식으로 보인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시기 각 황제들의 담당구역은 다음과 같다. * 동방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 (본부: [[이즈미트|니코메디아]]) * 아나톨리아, 오리엔스, 폰투스, 이집트 * 동방 부제: [[갈레리우스]] (본부: 시르미움) * 판노니아, 모이시아, 트라키아, 일리리아 * 서방 정제: '''[[막시미아누스]]''' (본부: [[밀라노|메디올라눔]]) * 이탈리아, 가까운 아프리카, 먼 아프리카, 히스파니아 * 서방 부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본부: [[트리어(독일)|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 * 브리타니아, 갈리아, 비네엔시스[* 갈리아는 프랑스 북부, 비네엔시스는 프랑스 남부.] 이러한 제도의 목적은 아래와 같다. * 제위계승에 군대 개입 방지. 이전 군인황제시대의 혼란상을 학습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를 방지하고자 했다. 황제 유고시에 부황제가 자동적으로 이를 승계하는것이 원칙이다. * 방어의 효율성 증가. 황제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여러 대책을 동시에 수행해 방어의 효율성을 높인다. 즉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이 들어와도 즉시 대처가 가능하다. * 내란의 조기진압. 네 명의 황제가 상대적으로 좁아진 자신의 관할구역을 철저히 감시해 내란의 가능성을 줄이고 내란이 일어난다 해도 이를 조기에 진압한다. 종합하자면 내란이 단순한 소란으로 끝나며, 내란이 길게 이어지거나 확대돼서 내전이 되는 것을 막는다. * 능력 위주의 황제 즉위. 방어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하여 임명되므로 다른 건 몰라도 군사적 능력 하나는 우수한 인물들이 혈통에 관계 없이 황제위에 오를 수 있다. 이에 따라 로마군의 전투능력을 높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다. 이는 어디까지나 군사적인 측면으로 내정이나 외교 등 다른 국가적인 측면에서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단독으로 전체 권리를 움켜쥐고 있었으며, 최소한 1차 사두정치 기간에는 동서방 정제/부제의 진퇴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권한이 컸다. 이 당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썼던 정식 명칭 중 하나엔 세니오르 아우구스투스, 즉 "선임(先任) 황제"도 있었을 정도. 당장 이 시기에 동방 부제였던 갈레리우스는 페르시아에게 패했을 때 황제보다는 일개 장수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다. 막시미아누스는 서방 정제이면서도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반강제로 끌려 같이 은퇴할 수밖에 없었기도 했고. 그러나 그가 은퇴한 뒤에는 그처럼 다른 황제들을 억누를 권위와 권한이 있는 황제가 없었고[* 그나마 갈레리우스가 2세대를 주도하기는 했다. 정제노릇을 305~311로 얼마 못 하고 일찍 죽어서 그렇지. 콘스탄티우스도 305~306으로 정제는 1년 밖에 못 하고 병사했다. 이 둘은 부제로 있는 동안 동-서방에서 누구나 인정받을 만한 군공을 세웠다. 이 둘이 일찍 죽은 것과, 그 다음의 부제 선정 때문에 그렇지, 안 그랬으면 좀 더 갔을지 모른다.], 제위 계승에서 제외된 황제들의 자식들(콘스탄티누스, 막센티우스)이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며 들고 일어나면서 결국 무너지게 된다. 공동 정제의 방식은 동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살아남았지만[* 그래서 동로마 황제의 계보가 매우 복잡하다. 재위기간도 마구 겹친다.] 이것이 상설화된 제도로 유지되기엔 역시 문제가 많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생전에는 본인의 카리스마로 묶어두는 게 가능했지만, 그 이후에는 네 명의 황제가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울 여지가 있었고(4명의 황제가 중심지로 삼는 곳에 로마가 포함되지 않아서 어느 누구도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수 없는 구조였다.), 실제로 그렇게 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