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디오클레티아누스 (문단 편집) === 황제 시기 ===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로마 제국]] 황제에 올랐을 당시의 로마 제국은 [[군인 황제 시대|3세기의 위기]]라는 미증유의 혼란 상태에서 헤매던 시기였다. 규모와 세력, 체제 측면에서 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강해진 [[게르만족]]과, [[파르티아]]보다 강력한 국력을 구축하고 동방 일대의 안전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한 [[사산 왕조|사산조 페르시아]]로 대표되는 외부의 위협 및 날로 더해지던 재정난 그리고 빈번한 내전으로 대표되는 내부의 문제가 이미 심각해질 대로 심각해져 있던 것이 3세기 당시의 [[로마 제국]]의 상태였다. 다행히 [[로마군]]은 [[세베루스 왕조]]의 황제들과 [[갈리에누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오랜 노력 끝에 제국을 수호할 만한 힘을 확보하고 있었고, 그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당면한 제국 방위를 수행했다. 이때의 [[로마 제국]] 군대는 종래의 [[레기온]] 체제에서 탈피한 지 오래로, 페르시아식 군사 제도와 야만족의 군대 양상을 취사 선택 및 개조한 상태였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때에 본격적으로 중장기병대인 클리바나리의 아이디어가 적극적으로 차용되기 시작했고[* 역설적이게도 이 아이디어는 '''내전'''에서 가장 효과적이었다.], [[카라칼라]] 황제 때에 종심방어에 필수적인 기동타격대 아이디어가 도입되었다. 갈리에누스 황제는 북부 이탈리아에 기지를 둔 상설 예비대를 창설했고 기병의 비율을 세 배 가까이 높였으며 [[무어인]] 경장 기마 투창병과 달마티아 외인 기병 부대, 강력한 [[컴파운드 보우|복합궁]]을 사용하는 오리엔트 궁수 부대, 페르시안 [[장창]]병대, 쐐기꼴 대형으로 전투하는 게르만계 보병, [[낙타]]부대 등을 적극적으로 도입했고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중장기병대인 클리바나리가 대폭 확대되어 이후 [[동로마 제국]]이 천 년을 더 버티게 한 새로운 군대의 원형이 갖추어진 상태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이러한 새로운 군대를 이끌고 내우외환을 진압해나가기 시작한다. 서방에서는 동료였던 [[막시미아누스]]를 [[285년]]에 부제로, [[286년]]에 공동 정제로 올려[* 공동 정제 자체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후 [[군인 황제 시대|3세기의 위기]]를 거치며 상당히 일반화된 방식이었다.] 서로마 일대로 파견, 갈리아 일대에서 일어난 바가우다이[* Bagaudae, [[갈리아어]]로는 '전사'라는 뜻인데 이때는 그냥 갈리아의 일반 농민을 의미하는 것으로 자리잡았다.] 반란을 [[287년]]에 강경 진압하고 제국 해군을 확충, 볼로뉴[* Boulogne, 이탈리아의 [[볼로냐]]와는 위치상 전혀 무관하고, [[갈리아]](프랑스) [[도버 해협|북부 해안가]]의 도시이다. [[칼레]]와 멀지 않다.]항에 해군 기지를 건설해 프랑크 [[해적]]들의 공세를 저지하게끔 한다. 그런데 얼마 안 가 그 사령관으로 발탁했다가 비리를 저질렀는데 그 규모가 커서 사형밖에는 답이 없어[* 할당받은 지역인 도버 해협을 프랑크 해적이 통과해서 노략질을 하도록 일단 방임한 뒤, 재물과 사람을 싣고 돌아가려 하면 '''그제야 출동해서''' 해적 소탕을 하고 '''재물도 모두 빼앗아''' 자기 것으로 취하는 '''기막힌 재테크 능력'''을 발휘하였다.(...)]도망가 [[로만 브리튼|브리타니아]]에서 독립을 기도한[* 처음에는 [[막시미아누스]]가 격퇴에 실패해서 독립인정을 몇 년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항목 참조] [[카라우시우스]] 또한 [[사두정치]] 이후 이 지역을 관할하게 된 서방 부제 [[콘스탄티우스 1세|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에게 진압된다. 동시기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 외의 반란 세력인 [[카르타고]]의 율리아누스, [[알렉산드리아(이집트)|알렉산드리아]]의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도미티아누스]]와 [[아우렐리우스 아킬레우스]]를 모두 강경 진압, 내부의 문제를 정리하고 [[사산 왕조|사산조 페르시아]] 또한 부제 갈레리우스의 활약에 힘입어 승리, 외적의 침공도 저지한다.[* 이미 그 이전 황제들의 노력으로 게르만족은 이때에는 어느 정도 잠잠했다.] [[아르메니아 왕국|아르메니아]]의 쫓겨난 왕자[* 아르메니아는 원래 왕가가 파르티아 왕가의 방계였는데, 사실상 본국이었던 파르티아가 사산 페르시아로 교체되자, 이 속국의 왕위에도 기존 왕가를 쫓아내고 [[나르세스 1세|자기네 왕족]]을 앉혔다.] [[티리다테스 3세]]를 [[287년]] [[바흐람 2세]]와의 조약으로 왕위에 올리는 등 대외 영향력도 뻗쳤다.[* 사실 페르시아와의 전쟁은 늘 주기적으로 있어왔던 상수였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 당대의 전쟁의 원인은 [[나르세스 1세|페르시아 내부의 집안싸움]] + 아르메니아라는 중간지대 소국의 존재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289년]]에는 동북방 유목민이었던 사르마티아족과 싸워 승리했다. [[291년]]에는 오늘날 에티오피아 지역의 [[악숨 왕국]]과 평화 조약을 맺었다. 이후 그는 전면적인 체제개혁을 수행하여 [[전제군주제|전제정]]을 구축하고는 서기 305년, 돌연 은퇴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