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디오클레티아누스 (문단 편집) === 황제 이전 시기 ===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에 의하면, 황제가 되기 전 이름은 '''디오클레스'''(Diocles) 또는 '''디오클레스 발레리우스'''(Diocles Valerius)였다고 한다. 서기 244년에 지금의 크로아티아 지방인 [[달마티아]] 지방의 [[스플리트]][* 당시 이름은 '''스팔라툼'''(Spalatum: 라틴어)/'''아스팔라토스'''(Aσπάλαθος: 그리스어). 나중에 자진 은퇴한(?) 후에도 여기서 살았다.] 근처의 살로나[* (이)Salona(e),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솔린(Solin)]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하층민 출신이었던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왜냐하면 [[콘스탄티누스 2세]]부터 [[테오도시우스 1세]]까지 고위관직을 지낸 《약사》의 저자인 [[에우트로피우스]][* 종종 '''유트로피우스'''라고도 번안되어 언급된다.]에 따르면, >"(후세) 대부분의 작가들은 그가 서기의 아들이라고 말했지만, 어떤 이들에 의하면 아울리누스라는 원로원 의원의 해방노예의 아들이었다." 고 말하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하층민 출신임에 더 무게를 뒀기 때문이다. 이는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콘스탄티누스 왕조]] 및 [[발렌티니아누스 왕조]]를 찬사한, 익명의 저자가 라틴어로 적은 《황제의 전형》(에피토메 데 카이사리부스)에도 비슷하게 적혀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여러 이야기와 달리 전임 황제인 [[카루스]]는 나르보 태생의 로마 귀족이었다고 하며,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원로원 의원인 아울리누스의 노예 부부가 낳은 아들로서 달마티아인이었고, '디오클레스'라는 이름의 뜻은 '디오클레아'라는 도시에서 따온 이름이며, 디오클레스의 부모는 그를 낳은 뒤에야 자유를 얻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 직업군인의 길을 선택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역시 그가 어떤 삶을 보냈고, 군단에서의 경력이 어땠는지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물론, 조작된 기록이 많아 신뢰받지 못하고 있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로마 황제 열전)에서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갈리아에서 복무했다고 하는데, [[아우렐리아누스]]나 [[프로부스]] 같은 군인 출신 황제들과 달리 구체적이지 않고, 이 기록 홀로 주장하는 탓에 수많은 연구자들에게 무시를 받고 인정되지 못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이름이 등장한 것은 대략 [[프로부스]] 황제의 뒤를 이은 원로원 의원 출신의 [[프라이토리아니]](근위대) 대장 [[카루스]]가 제위에 오른 이후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카루스]] 황제의 은덕으로 38세의 나이에 카루스의 차남인 [[누메리아누스]] 황제를 경호하는 프로텍토레스의 기병 지휘관으로 있었다. 이후 그는 카루스와 누메리아누스 부자를 따라 동방의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과의 전쟁에 참전했다. 카루스 황제의 로마군은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셀레우키아를 점령하고, 티그리스 강을 건너 수도인 [[크테시폰]]마저 장악하면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283년 8월 벼락이 황제의 막사에 떨어져 카루스 황제가 즉사하는 사고가 벌어졌다. 따라서 원정군은 혼란에 빠졌고, 젊은 누메리아누스 황제는 망연자실해 어쩔 줄 몰라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