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디오클레티아누스 (문단 편집) === 은퇴 이후 === 20년을 통치한 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자진하여 퇴위한 것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물론 그 개인적으로는 건강을 해친 듯한 모습을 많이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진해서 제위를 물러나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자진 퇴위한 황제는 사실상 그밖에 없었다.[* 공화정 시기를 따진다면 독재관의 자리에서 물러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있긴 하다.] 그래서 나중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죽었을 때 황제의 관례대로 사후 신격화가 되면서, 죽기 직전에는 일개 로마 시민일 뿐이었음에도 신격화된 사례가 되었다. 갈수록 줄어드는 정치적 영향력 때문에 은퇴를 했다는 설을 당대의 일부 역사가들이 제기하긴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영향력은 306년에도 건재했기에 현대의 연구자들은 이걸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는다. 그가 은퇴하면서 서방 정제였던 막시미아누스도 같이 은퇴시킬 정도로 권력이 막강했음은 이런 정황을 다시 입증한다. 스팔라툼[* 현재 [[크로아티아]]의 [[스플리트]].]에다가 바다에 접한 개인 궁전을 건설하고, 그곳으로 은퇴해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지금도 스플리트에는 궁전의 흔적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306년에는 제위에 복귀해 달라는 막시미아누스의 전갈에 이렇게 대답했다. >'''"내 손으로 직접 심은 [[양배추]]를 보여 줄 수 있다면, 그도 권력을 추구하는 데서 행복을 찾는 짓을 단념할 텐데."''' >---- > 출처 - 《비잔티움 연대기》. [* 그 이후에는 막시미아누스도 느끼는 바가 있었는지 퇴위하지만, 아들인 [[막센티우스]]와 엮이면서 번복했고, 그 결과 말년이 비참해졌다.] 이후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의 급사와 [[사두정의 내전|이후의 혼란]]을 정리하고자 복귀한 막시미아누스, 정제로 즉위한 갈레리우스와 함께 308년에 회담을 열기도 했지만 310년에 [[막시미아누스]]가 자살한 이후에는 정치 문제에서 완전히 손을 떼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죽은 정황은 그리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당시가 내전 때문에 혼란스럽기도 했고, 그의 영향력이 완전히 소멸되었기 때문에 자세한 기록을 남길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전해지는 야사에 따르면 자신의 체제 개혁이 처참한 실패로 빠졌다는 점, 그렇다고 자의로 물러났는데 복위할 수도 없게 된 점으로 실의에 빠져 자살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는 언급했다시피 공식적인 기록은 아니다. 그렇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말년에 참담한 심정이었다는 말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그의 영향력이 소멸된 대표적인 사례는 그의 아내인 [[아우렐리아 프리스카]]와 그의 외동딸이자 동방 정제 갈레리우스의 아내였던 [[갈레리아 발레리아]]의 죽음에서 드러난다.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갈레리우스 정제의 조카로 부제에 있다가 갈레리우스의 사망 이후 동방의 정세를 장악했다. 그러나 서방의 정제로 올라선 [[콘스탄티누스 1세]]와, 서방의 정제였다가 슬금슬금 동방으로 넘어가[* 경쟁자가 서방에는 콘스탄티누스 1세와 막센티우스 두 명인데, 동방에는 막시미누스 다이아 한 명뿐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더군다나 있었던 위치도 일리리아로 동방과 가까웠던 데다가, 원래 서방 정제의 영역인 이탈리아는 막센티우스가 꽉 쥐고 있었다.] 라이벌 관계가 되어버린 [[리키니우스]]가 [[적의 적은 나의 친구|공동의 적에 대처하기 위해서]] 혼인동맹을 맺게 되자 여기에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발레리아에게 청혼을 했으나 거절당했다. 여기에 화가 난 그는 발레리아와 그녀를 보기 위해 와있었던 프리스카를 감옥에 넣어버렸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에 항의하여 서한을 보냈고,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발레리아와 프리스카를 석방했으나, 재산을 몰수하고 [[오리엔트]]로 추방시켰다. 이후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리키니우스]]에게 패배하자 발레리아와 프리스카는 리키니우스에게 의탁할려고 했는데, 리키니우스는 그녀들에게 오히려 군대를 보내 살해하고 말았다.[* 모녀의 죽음은 디오클레티아누스 사후의 일이었다. 문헌의 기록과 연구를 종합해보면 모녀가 추방당한 직후, 또는 몇 달 후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죽었을 걸로 보인다. 슬프게도 그가 뭘 어찌 해보기에는 신체가 따라주지 않았을 것이다] 즉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마지막으로 회담을 연 지 5년 만에 그는 자신의 아내와 하나뿐인 딸도 지키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한 것이었다. 그리스도교를 조직적으로 박해했던 이답지 않게, 의외로 권력의 속성과 사람의 심리에 지나치게 순진하고 이상주의적이었던 듯하다. [[사두정치]]는 설계부터 지속 가능성이 떨어졌다. 물론 나중에 [[콘스탄티누스 1세]]가 복수는 해 주지만 그마저도 그가 살아 있을 때가 아니라 죽은 뒤였고, [[결과는 좋았다|경쟁자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어쩌다가 복수해준 셈이 되었을 뿐이었다.]] 자진 퇴위는 비록 디오클레티아누스 스스로 내린 정치적 선택이었을지는 몰라도, 그가 구축해놓은 체계는 물론이고 그의 가족도 비극적으로 최후를 맞는 결과를 야기했다. 거의 모든 정책을 멀리 내다보고, 강한 결단력으로 밀어붙여 성공했으나, 후계자 지명에서 갈레리우스의 정치적 이익에만 맞게 비상식적으로 안배하는 바람에 초래된 안타까운 자업자득이었다. 갈레리우스의 오랜 부하긴 했어도 능력은 검증된 세베루스야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으나, 갈레리우스의 생질에 불과한 막시미누스 다이아를 선정한 건 큰 실수였다. 오히려 아버지 막시미아누스보다 정치적인 자질과 인격, 자제력이 뛰어났던데다가 갈레리우스의 사위기도 했던 [[막센티우스]]를 부제로 선정했다면 이렇게까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위안은,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그가 실시한 정책을 거의 대부분 그대로 계승할 만큼 사회적 필요성이 인정되었고, 훗날 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1,100여년의 기간을 지탱해준 것은 그의 제도적 개혁에 의해서라는 것을 현대 학자 거의 모두가 인정하고 있음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라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제국 체제를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 만든 건 아니었지만, 그간 행해진 개혁 조치들과 비상 조치들을 집대성하여 체계적으로 배치하고, 시대 상황에 맞게 없앨 건 없애며 전국화할 것은 전국화한 조치들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이었다. 즉 본인의 결말은 좋지 못했지만 '''무너지던 대제국을 재건하여 1,000년을 더 지속시키는 큰 업적을 남긴 황제였다.''' 체제 개혁에 대한 기여라면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비견할 만한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훗날 등장하는 콘스탄티누스 1세는 원수정 기준으로 따지면 티베리우스 포지션이었고, 나름 찌질한 인격 때문에 당대에나 지금이나 욕을 먹는 콘스탄티우스 2세는 클라우디우스 1세 정도라고 보면 되겠다.] [[분류:디오클레티아누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