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디오클레티아누스 (문단 편집) ==== [[이교]] 금지 정책 ==== 로마 제국 체제의 효율성을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그 자신이 로마 제국에 있어 위험요소라 생각한 사상이 로마 제국으로 침투하는 것을 파괴하고자 했다. 그 대상이 된 것은 [[그리스도교]], 그리고 [[마니교]]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세에 그리스도교는 비록 로마제국의 다수를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초창기부터 체계적으로 조직과 교리를 정립하여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4세기]] 초 그리스도교도들은 로마제국 전체 인구의 최소 10% 이상[* 출처: 에이드리언 골즈워디 저 <로마 멸망사> p239]을 차지했으며, 로마제국의 동부지역에 집중해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 다음으로 예수의 복음을 일찍 수용한 이들이 그리스인들이었다.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고 나아가 국교로 삼은 뒤에 임명된 다섯 [[총대주교]] 가운데 네 명이 동방 지역([[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콘스탄티노플]],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총대주교|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알렉산드리아]])에 몰려 있었을 정도.] 일부 지역에서는 다수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 시기 황제들은 그리스도교를 무시하지 못했고, 박해가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던 [[갈리에누스]] 황제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 이전까지 그리스도교는 세력을 꾸준히 늘려 유력한 사회집단으로 자리매김했다. 드러내놓고 교회를 짓는 도시와 마을이 늘었으며, 주교는 지역사회 유력자 계층의 일원으로 대접받을 정도였다. 실제로 [[니코메디아]]의[* 동방 정제의 치소]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황궁 바로 옆에도 교회가 하나 존재했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 그리스도교가 제국을 뒤흔드는 위협 세력이라는 생각은 거의 사라졌고, 공무를 수행하는 데 종교는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디오클레티아누스도 초기 십수 년간은 그다지 박해하려는 뜻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본심은 그렇지 않았다. 철저한 중앙집권적 전제정권을 수립하고 이를 통해 로마제국의 효율성을 증대시켜 위기를 극복하고자 추구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스스로를 신성화했는데, 심지어는 [[제우스]]가 직접 지명했다는 말에 자신이 곧 신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다녔다. (이 시기 기록에는 [[왕권신수설]] 저리 가라 할 만한 내용이 많다.) 그런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그리스도교는 자신의 체제개혁과 정반대에 있는 강력한 적대세력이므로 당연히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로마 역사상 마지막이 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대규모 박해]]를 실시했다. 시작은 297년이었다. 이 해 그는 나라 안의 모든 [[공무원]]들과 병사들에게 제단에 제물을 바침으로써 충성심을 증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일부는 사임했고, 시늉만 하는 사람도 있었다.[* [[락탄티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니코메디아 황궁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이교 제사를 집전할 때, 참석한 기독교인 신료들이 성호를 그었다고 한다.] 이 명령에 극렬히 반대하는 활동을 벌였던 일부는 처형당했다. 드디어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는 조직적이고 치밀해졌다. 사위이자 후계자 갈레리우스를 내세워 [[니코메디아]]의 황궁에 발생한 화재를 그리스도교 탓으로 돌리고, 그리스도교를 제국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규정하여 탄압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성당을 철거하고 성물을 파괴하며[* 니코메디아의 갓 완공된 대성당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소유한 재산은 전부 압류해 국고에 집어넣었다. 특히 그는 일반 신자들을 일일이 잡아넣기보다는 [[사제(성직자)|사제]], [[주교]]들을 체포해 개종시키거나 처형하고자 노력했는데, 이는 그가 그리스도교의 조직체계를 파괴하고자 했음을 의미할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교도인 관료와 군인 등이 면직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세가 강했던 제국 동방에서 강한 저항이 일어났고, [[소아시아]]처럼 대규모 봉기가 일어난 곳도 있었으나 군대를 보내 진압했다. [[304년]]에 공포한 마지막 칙령은 상대가 그리스도교인이라면 고발이 없어도 추적하여 [[고문]]할 수 있도록 하였고, 모든 사람이 [[로마 다신교|로마 신의 제례]]를 거행해야 하며, 이를 어기면 사형이나 [[강제노동]]에 처하겠다고 명령했다. 더 나아가 배교냐 죽음이냐의 [[이지선다]]를 강요했다. 이로 인해 순교자와 배교자가 잔뜩 발생한다. 다만, 이 칙령은 지역에 따라 적용강도가 들쑥날쑥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관할한 땅에서는 박해가 강력했지만 막시미아누스와 갈레리우스는 좀 덜했고, 콘스탄티우스는 성당 건물만 파괴하고 신도들을 처형하는 일은 드물었다고 한다. (제국 서방지역 중에서도 가장 서쪽이었기에 신자의 숫자가 적었던 것도 한몫 할 것이다.[* 비그리스도교 내지는 이교도의 의미로 쓰이는 Pagan이란 영단어는 라틴어 Paganus(시골 사람)에서 유래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대부분 도시인이었기 때문에 이와 대비하여 표현한 것이다.]) 교회 자료에는 순교자가 약 3천-3천5백 명 정도라 하지만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리스도교 박해는 대략 309년까지 지속되었고 311년에는 잦아들었다. 313년에는 신앙의 자유를 선포한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가 공포한 [[밀라노 칙령]]으로 박해가 완전히 끝났다.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마니교]]도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마니교는 로마 제국의 제1적국인 [[페르시아]]에서 유래한 종교이므로 박해할 이유를 찾기 쉬웠고, 그 세가 그리스도교보다는 덜하므로 제거하기도 쉬웠다. 302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마니교를 두고 페르시아에서 뻗어온 흉물스런 집단이며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고 비판하는 칙령을 내리고 강력하게 탄압했다. 마니교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 이후에도 꾸준히 탄압받아 결국 소수종파로 연명했을 뿐 크게 성장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4-5세기의 저명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가 생전에 마니교도가 된 적이 있다고 술회하였던 만큼, 지역에 따라서는 나름대로 마니교가 세가 강했던 곳도 있던 듯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