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디오클레티아누스 (문단 편집) == 개요 == >무능한 지도자와 야만족의 침략으로 곤경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던 제국을 구출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일리리아]] 지방 출신 농민들'''[* 사두정의 황제들과 잠깐의 중흥을 이뤄낸 그 이전의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아우렐리아누스]], [[프로부스]] 황제의 출신은 모두 일리리아([[발칸 반도]] 서부)였다.]'''이 그 일을 해냈다. >----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의 제43대 황제이자 [[사두정치]] 체제(테트라키아, Tetrarchia)의 창시자이다. [[콘스탄티누스 1세|콘스탄티누스]] 대제와 [[테오도시우스 1세|테오도시우스]] 대제를 로마 제국 분할의 아버지로 친다면, 그는 군인 황제 시대와 혼란을 끝낸 황제였다.[* 분할을 잘못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지만 이는 학계에서 진지하게 제시하는 의견이 아니며, 대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왕권신수설을 꺼내들었고, 완전 세습의 길을 열었다는 얘기 또한 그러하다. 로마 제국의 제위 세습 관행은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때부터 시작된 것이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위에서 세습이 테오도시우스 1세 이후에 유일한 관행으로 굳어진 바 없다. [[로마의 역대 황제#s-3|동로마 제국 시대의 황제 목록]]을 보면 참 정신이 없는데, 친인척이나 장군, 고관 등을 공동황제로 세운 탓이다.] 그외에도 [[콘스탄티누스 1세]] 시기 ~ [[마우리키우스]] 시기에 해당되는 여러 군사, 정치, 사회 제도는 그 근본을 찾으면 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시초였던 것이 많다. 다만 일구어낸 업적은 콘스탄티누스 1세, 테오도시우스 1세, [[유스티니아누스 1세]]를 가리키는 '''3대제''' 이상임에도 제대로 평가받진 못했고, 그 이유는 당대에도 혼란을 끝냈다는 평가 외엔 그렇게 많이 인기 좋은 황제는 아니었기도 하거니와 그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황제[* 직접 통치했던 [[이집트]]에서 대대적인 그리스도교 박해를 행한 결과, 순교자가 많이 나왔다. [[콥트 정교회]]에서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즉위한 서기 284년을 순교자기원 원년으로 삼는다.]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업적과 내용이 구체적으로 재조명된 것은 체제적, 유물론적 연구가 활성화된 근대의 이야기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