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득롱망촉 (문단 편집) == 유사 사례 == [[후한]] 말엽 [[조조]]가 215년에 [[한중]]을 칠 당시에 이 말이 다시 쓰인다. 당시는 [[익주]]를 차지한 [[유비]]가 [[손권]]과 [[익양대치]]를 하고 있을 무렵으로 유비는 형주 남군 공안에 있었다. 조조는 211년에 [[마초]]의 관서 연합군을 물리쳤고, 이후 기성을 중심으로 재기한 마초가 [[양부]]의 반란으로 한중으로 패퇴하자 [[하후연]]으로 하여금 관서를 평정하게 했다. 또 농서를 잃고 나서도 한중에 의지해 농서를 끈질기게 공략하는 마초를 후원하며[* 다만 마초는 214년에 유비에서 귀부하여 더 이상 장로가 농서를 칠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농서를 위협하던 [[장로(삼국지)|장로]]의 본거지 한중을 쳐서 장로가 파중으로 달아나니[* 사실 장로는 [[염포]]가 파족의 이민족인 [[두호]]에게 의지하면서 [[박호]]에게 가서 서로 대치하면서 훈공을 높이라는 조언을 하자 바로 항복하려던 생각을 버리고 파중으로 간 것이었다. 이는 자신의 힘이 상당히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자신의 몸값을 높이는 뜻이라고 권중달 교수는 국역 자치통감 주석에서 서술한다.] 사실상 농서 땅[* 사실 농서는 장로의 근거지인 익주 북부보다는 더 북쪽에 있다. [[삼국지/지명]]에서 '양주' 문단을 참고하라.]을 조조가 완전히 확보한 셈이 되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이렇게 장로가 도망가고 조조가 한중의 중심지 남정에 들어왔을때 승상주부 [[사마의]]가 지금 한중을 점령해 익주가 진동하고 있다며 기세를 몰아 촉까지 진격하면 저들은 [[기와]] 깨지듯이 무너질 것이라며 건의했다. 그러나 조조는 "(나는 광무제가 아닌 고로)사람이 고통스러운것은 만족함이 없기 때문인데 이미 농을 얻었으니 다시 촉까지 바라겠는가?" 라며 그 제안을 기각했다. 조조가 득롱망촉을 말하자 이번엔 [[유엽]]이 다시 권한다. 유엽은 유비는 인걸(人傑)로서 헤아림이 있지만 그러나 더디며[* 유엽전에서는 '유비는 인걸(人傑)로서 도량이 있고 계략도 있다'라고 평가한다.], 촉나라를 수중에 넣은 지 얼마 안 되므로 촉나라 사람들은 아직 믿고 의지하지는 않고 있다. 이제 한중을 깨뜨렸으므로 촉나라 사람들은 놀라고 두려워하며 하는데 만일 그들을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두어 [[제갈량]]은 다스리는데 밝아 재상이 되고 [[관우]]와 [[장비]]는 삼군(三軍)을 뒤덮을 만한 용맹으로 장군이 되고, 촉나라 백성들이 이미 안정되었다면, 험준한 곳을 거점으로 하여 요충지를 지키면 이길 수 없다. 지금 공격해서 취하지 않으면 나중에 반드시 근심거리가 될 것이라며 공격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조조는 이 말도 거절한다. 이렇게 조조의 군대가 머문 지 7일이 되었는데, 촉에서 항복해 온 자가 촉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번의 놀랄일이 있어, 수비하는 장군들이 그들을 베었지만 안정시킬 수 없었다고 보고한다.[* 유엽전 주석 부자에 따르면 유비가 베었다고 한다.] 이 때서야 조조가 미련이 남았는지 다시 물어봤는데 유엽은 투항자를 보고 이미 유비가 안정되었으니 불가능하다고 진언한다. 결국 조조는 촉을 치는것을 그만둔다. 자치통감의 음주자 호삼성은 이 사건을 논평하면서 유엽을 깐다. 어떻게 그 7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갑자기 안정되었다고 말할수가 있느냐고, 호삼성은 유엽이 유비가 촉 지역을 지키고 있는 것을 살펴보고 범접할 수 없는 면이 있어서 (그제서야) 이런 말로 조조에게 대답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호삼성의 말은 즉, 익주는 사실 안정되었으며 유비의 반군세력에 대한 진압이 확실히 이루어졌다는 것을 유엽이 알았을 것이라는 말이라고 보여진다. 한편 [[정사 삼국지]] [[법정(삼국지)|법정]]전에 따르면 법정은 이때 조조가 진군하지 않은것을 조조가 멍청해서가 아니라 조조군 내부의 사정이 있었지 않았을까로 추정했다. >조조는 한번의 행동으로 장로를 항복시키고 한중을 평정하였는데, 이 형세에 의지하여 파와 촉을 취하지 않고 하후연과 [[장합]]을 남겨 주둔하며 지키게 하고 자신은 돌아갔습니다. 이는 그 지혜가 충분하지 않고, 힘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틀림없이 속으로 급박한 걱정거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법정의 말대로 조조는 당시 상황에서 촉으로 들어가기에는 내부 사정상 여력이 모자라고 그 까닭에 익주로 진공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그리고 어쨌든 당시 유비 진영에서는 생각보다 장로가 쉽게 무너지자 놀랐기 때문에 유비는 바로 손권과 상수를 경계로 영토를 나누는 협상을 하고 돌아왔고 그 전에도 제갈량이 남아 익주를 수비하고 있었다. 또 파군에서는 파서태수 [[장비]]가 대비하고 있었고 [[검각]]의 지세가 험난했으므로 사마의의 말대로 공격에 나섰어도 성공은 어려웠을 것이다. 조조가 남정을 얻고 바로 진격하지 않은건 후일 제갈량이 북벌할때 그랬듯 한중을 중간기지로 삼고 지배권을 공고히 할 생각에 그랬을 것이다. 만약에라도 입촉 후에 장로의 잔당이나 이 지역의 강, 저족의 반란이 일어나면 보급이 끊기는 치명적 상황에 처할수도 있으니까. 한편 익주로 돌아온 유비는 바로 [[황권]]의 조언을 받아 파중으로 달아난 장로를 받아들일 생각을 하지만 황권을 호군으로 보내 제장을 거느리고 장로를 맞이하기도 전인 215년 11월에 장로가 휘하 가신들인 염포, [[정은(삼국지)|정은]], [[후선]], [[방덕]]과 함깨 조조에게 끝내 항복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대신 황권은 장로와 있던 [[박호]], [[두호]], 임약 등을 공격하여 격파했다. [[분류:고사성어]]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