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두한휘 (문단 편집) == 생애 == 경조부(京兆府) 장안현(長安縣) 출신으로, 태원에서 위승군사(威勝軍使)를 지냈던 두아손(杜阿孫)의 아들로 태어났다. 두한휘는 17살에 [[이극용]]을 섬겨 이극용의 휘하에서 청직대장(廳直隊長)을 지냈다. [[후당]]이 건국된 뒤, 두한휘는 호성군사(護聖軍使)까지 승진하였다. [[후진]]이 들어선 뒤, 두한휘는 모용업(慕容鄴) 등과 함께 안주(安州)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금전(李金全)을 토벌하고 지휘사(指揮使) 손후(孫厚)를 사로잡았으며, 공적을 세워서 흥순지휘사(興順指揮使)로 승진하였다. 이후 진주(鎭州)에서 반란을 일으킨 안중영(安重榮)을 토벌할 때도 참전하여 호성지휘사(護聖指揮使)로 전임되었고, 아버지인 두아손은 좌찬선대부(左讚善大夫)로 추증되었다. 945년에는 심주(深州)에 진수하여 악수(樂壽)에서 [[요나라]]의 침공을 물리쳤다. [[후한(오대십국시대)|후한]]이 들어선 뒤, 두한휘는 고행주(高行周)를 따라 업에서 반란을 일으킨 두중위(杜重威)를 토벌하였다. 두한휘는 여기서 수많은 상처를 입었음에도 전장에 뛰어들어 전공을 세웠다. 두한휘는 다시 진주에 진수하여 영수(靈壽)에서 요나라의 침입을 물리쳤고 수많은 군마를 노획하였다. [[후주]] 시기에 두한휘는 [[북한(오대십국시대)|북한]] 정벌에 참가하고 공을 세워 용첩좌제5군도우후(龍捷左第五軍都虞候)로 승진하였다. 또한 안평현(安平縣)에 진수하며 다시 요나라의 침공을 물리쳤으며 용첩좌제4군도우후로 옮겼다. [[북송]]이 건국된 뒤 두한휘는 무주(茂州) 자사를 겸임하였다가, 다시 조주(潮州) 자사를 겸임하였다. 두한휘는 [[이균]]의 반란을 평정할 때 참전하였고 다시 [[이중진]]의 반란을 토벌할 때 참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962년에는 천장군사(天長軍使)를 맡고, 웅무군사(雄武軍使)로 옮겼으며 둔전 사무를 맡았다. 두휘는 같은 해 겨울에 병에 걸려 부절과 각인을 통판(通判) 송란(宋鸞)에게 주고 수도로 돌아가기를 주청하였다. 두한휘의 집안 사람이 치료를 권하자, 두한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치료를 거부하였다. >나는 40년 동안 군대에 있었고 크고 작은 싸움만 백여 번을 치렀는데, 죽지 않으면 다행이지, 어찌 약을 쓸 수 있겠소? 두한휘는 이 말을 남기고 얼마 뒤에 죽었다. [[분류:송나라/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