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두막루 (문단 편집) == 역사 == >물길국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으니, 옛 [[숙신]]국의 지역이다. 읍락마다 각각 우두머리가 있으며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는 않다. 그들은 굳세고 흉폭하여 [[동이]] 중에서 가장 강하며, 언어도 그들 만이 다르다. 두막루(豆莫婁) 등의 나라를 항상 깔보며 여러 나라도 이들을 두렵게 여긴다. >勿吉國, 在高句麗北, 舊肅愼國也. 邑落各自有長, 不相總一. 其人勁悍, 於東夷最强. 言語獨異. 常輕豆莫婁註 等國, 諸國亦患之. 去洛五千里. 自和龍北二百餘里有善玉山, 山北行十三日至祁黎山, 又北行七日至如洛瓌水, 水廣里餘, 又北行十五日至太魯水校勘, 又東北行十八日到其國. 國有大水, 闊校勘三里餘, 名速末水. >- [[위서]] [[물길]]전 >豆莫婁國, 在勿吉國北千里, 去洛六千里, 舊北扶餘也. 在失韋之東, 東至於海, 方二千里. 其人土著, 有宮室倉庫. 多山陵廣澤, 於東夷之域最爲平敞. 地宜五穀, 不生五果. 其人長大, 性强勇, 謹厚, 不寇抄. 其君長皆以六畜名官, 邑落有豪帥. 飮食亦用俎豆. 有麻布, 衣制類高麗而幅大, 其國大人, 以金銀飾之. 用刑嚴急, 殺人者死, 沒其家人爲奴婢. 俗淫, 尤惡妬婦, 妬者殺之, 尸其國南山上至腐. 女家欲得, 輸牛馬乃與之. 或言本穢貊之地也. >두막루국은 물길국 북쪽 1천 리에 있고 [[낙양]]으로부터 6천 리 떨어져 있다. 옛날의 [[북부여]]다. 실위의 동쪽에 있고, 동쪽은 바다와 닿아있고 사방 2천 리이다. 그 사람들은 토착하며 살고, 집에 거주하며 창고가 있다. 산과 구릉, 넓은 연못이 많아 동이 지역에서 가장 넓고 높다랗게 트여있다. 땅은 오곡에 알맞고 오과가 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키와 몸집이 크고, 성품이 강직하고 용맹하고 신충하고 중후하니 노략질을 하지 않는다. 그 군장은 모두 여섯 가축의 이름으로 관직명을 삼고 읍락에는 호걸과 장수가 있다. 음식은 역시 조두를 사용한다. 삼과 베가 있고 옷을 마름질하는 것은 [[고려]]와 비슷하나 폭이 크다. 그 나라의 대인은 금과 은으로 장식한다. 형벌은 엄하고 급하여 살인자는 죽이고, 그 집안은 노비로 삼는다. 풍속은 음란하고 투기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여서 죽여서 시체를 나라의 남쪽 산 위에 놓고 썩힌다. 여자 집에서 이 시신을 거두려면 소나 말을 주어야 한다. 혹 말하길 본래 예맥의 땅이라고 한다. >위서 두막루전 [[위서]] 두막루전이나 아래의 신당서 기록과 종합하여 성립시기를 빠르게 잡으면 5세기 초 또는 중엽 이전이라고 추측한다. 485년과 486년 물길은 북위에게 사신을 파견했는데 이때 (아마도 두막루인 듯한) 대막로국(大莫盧國)이 사신을 파견한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태화(太和) 9년(485)에 (물길에서) 또 사신 후니지(侯尼支)를 파견하여 조회(朝會)하였다. 그 이듬해에 다시 입조(入貢)하였다. 그 나라 근처에는 '''대막로국(大莫盧國)'''·복종국(覆鍾國)·막다회국(莫多回國)·고루국(庫婁國)·소화국(素和國)·구불복국(具弗伏國)·필려이국(匹黎尒國)·발대하국(拔大何國)·욱우릉국(郁羽陵國)·고복진국(庫伏眞國)·노루국(魯婁國)·우진후국(羽眞侯國)이 있는데, 연이어 각각 사신을 보내어 조헌(朝獻)하였다. - 위서 물길전] 그런데 두막루를 설명한 [[위서]] 두막루전의 내용은 '''[[삼국지]] 동이전에 나오는 [[부여]] 관련 기록을 거의 [[복붙]]하다시피 똑같아서''' 사료의 신뢰성이 의심되기도 한다. 이 부분을 가지고 '부여 풍습과 두막루 풍습이 비슷하니 두막루가 부여의 후계국가가 아닌가?'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풍습이 비슷한 수준이 아니라 한문으로 씐 서술 자체가 거의 똑같기 때문에 무성의한 복붙으로 보일 여지가 큰 것이 문제. 두막루가 부여계가 아니라 단지 부여계를 자칭했을 뿐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일부 학자들은 부여계가 맞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래 써 있다시피 학계에서도 인지도가 듣보잡인지라 논쟁은 그냥 정체 상태다. 위서 [[실위]]전에서도 두막루가 나오는데, [[동호]] 계통인 실위와 두막루의 언어가 같다고 기록했으므로 부여계와 동호계의 언어가 같았다는 추측할 수도 있다. 그리고 [[위서(역사책)]] 문서에서도 소개하였듯, 이 책 자체가 가짜는 아니지만 '더러운 역사서(穢史, 예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정확도나 공정성이 전체적으로 낮아 천수백 년 전부터 계속 까여온 책임도 문제다. >開元十一年, 又有達末婁․達姤二部首領朝貢. '''達末婁自言北扶餘之裔, 高麗滅其國''', 遺人度那河, 因居之, 或曰他漏河, 東北流入黑水. 達姤, 室韋種也, 在那河陰, 涷末河之東, 西接黃頭室韋, 東北距達末婁云. >개원 11년(723)에 또 달말루와 달구 등 두 부락의 수령들이 조공하였다. 달말루는 스스로 말하기를 북부여의 후예로서 고(구)려가 그 나라를 멸하자 유민들이 나하를 건너 그곳에 거처하게 되었는데 혹은 타루하라고 하는 물줄기가 동북쪽으로 흘러 흑수에 유입된다 하였다. 달구는 [[실위]]의 종족으로 나하의 남쪽, 동말하의 동쪽에 있으며, 서쪽으로 황두실위와 접하며 동북쪽으로는 달말루에 이른다고 하였다. >---- >[[https://zh.wikisource.org/wiki/%E6%96%B0%E5%94%90%E6%9B%B8/%E5%8D%B7220#.E5.80.AD.EF.BC.8C.E6.97.A5.E6.9C.AC|신당서 권 220]][* 관련 주소 클릭 뒤 高麗滅其國 를 검색하면 된다.] 이들은 [[당나라]]에도 조공했기 때문에 [[신당서]] 열전에도 남아있다.--그런데 어째서인지 이 기사가 [[왜국|왜]], [[일본]] 기록의 맨 마지막 문단에 기제되어 있다--여기서 달말루(두막루)는 북부여의 후예라고 했는데, 달막루인의 '자칭(自言)'이라고 써서 신당서 편찬자도 신빙성을 보장하지 않았음이 문제.[* [[교차검증]] 없이 자칭한 것으로 따지면 고구려는 [[기자조선]]을 계승했다고 여겼고 [[신라]]는 [[흉노]] [[김일제]] 후손이며 거란은 고구려를 이었다고 주장했다. [[고려]] [[왕건]]은 [[당숙종]]의 후손이다. 물론 현대 사학계에서는 저것들 모두 신빙성이 부족한 자칭으로 결론났다. 굳이 자칭, 혹왈 같은 표현 붙이는 건 그대로 받아들이기 특히 위험하다는 것이다.] 헌데 무슨 이유인지 [[수나라|수]]·[[당나라|당]]이 만주를 공격하던 6세기 말부터 7세기까지는 이들의 [[조공]]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이 시기에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조공 기록이 8세기 초반까지 지속되다 사라지기 때문에 이쯤에 멸망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8세기 초반은 때마침 [[발해]] [[무왕(발해)|무왕]]과 [[흑수말갈]]이 충돌하던 시기인데 두막루의 정확한 위치는 고고학적으로 발견된 바가 없지만 발해와 흑수 말갈 사이에 끼어 있다고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보다 두막루를 연구한 내용 자체가 손가락으로 셀 정도지만. 멸망 이후 실위와 함께 [[몽골]] 지방으로 이동하면서 그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실위]], [[고막해]], [[거란]]과 같은 말을 썼다는 기록으로 봐선 몽골 지방으로 이동 후 몽골계 민족들에게 동화된 것 같다. 영토는 사방 이천 리로 서쪽에 [[실위]], 남쪽에 [[말갈]]이 있고 동쪽으로는 바다에 접한다는데, 동쪽 바다라는 게 [[아무르강]]인지 [[오호츠크해]]인지 [[동해]]인지 '''모른다.''' 두막루를 연구한 유태웅 교수의 두막루국 흥망사 시론 연구(2004)에서는 724년 즈음 [[발해]]와 [[흑수말갈]] 간의 대립으로 중간에 낀 두막루는 멸망한 것으로 파악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