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파키스탄 (문단 편집) === 독재와 동벵골 탄압 === 그러나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의 동등한 권리 보장 약속은 처음부터 지켜지지 않았다. 1958년 아유브 칸이 쿠데타를 통해 헌정을 뒤엎고 독재정권을 수립하면서 서파키스탄인이 권력을 독점해나가는 바람에 차별이 오히려 심화되고,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 간의 격차도 더더욱 커지게 되었다. 본래 아와미 연맹은 결성 초기에는 동파키스탄의 경제 개발과 파키스탄 중앙 정부의 동파키스탄 정책 개선을 요구하는 수준이었지만, 독재와 차별이 심화되자 1964년에 들어서면서 동파키스탄의 완전 자치를 외치기 시작했고 1960년대 후반기 아유브 칸 군사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반정부 운동에까지 참여하면서 [[1969년]] 아유브 칸 대통령의 퇴진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때 1970년 11월 12일에 동파키스탄 지역에 초대형 태풍 볼라 호가 강타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최대 5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구호 작업이 진행되었으나 파키스탄 정부가 구호에 굉장히 무성의하게 대응한 것이다. 태풍 상륙 이전부터 경계령을 내렸던 인도와 달리 파키스탄에서는 당일에야 경계를 내려 피해가 커졌으며, 구호 작업에서도 경비행기, 수송기만 동원할 뿐 정작 필요한 헬리콥터는 보내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 핑계가 인도 정부가 영공 통과를 허가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는데 이에 대해 인도 정부는 아니라고 반박하자 헬리콥터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보내지 않았다고 말을 바꾸었다. 더군다나 파키스탄은 국제사회에서 받은 원조물자를 불공평하게 배분해 동벵골인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서파키스탄의 빈민층에게 많이 주고 지원이 필요한 동파키스탄의 방글라데시인들에게는 적게 주었다. 자연히 동파키스탄 주민들의 불만은 쌓여갈 수밖에 없었다. 한편 물러난 아유브 칸의 뒤를 이어 파키스탄의 대통령이 된 야히아 칸은 권력을 민간 정부로 이양할 뜻을 밝혔고 이듬해인 [[1970년]] 치러진 민정 이양 총선에서 동파키스탄의 완전한 자치 확대를 주장했던 아와미 연맹이 동파키스탄 지역 선거구를 거의 석권해 총 의석 313석 가운데 160석, 과반의석을 획득하는 압승을 거두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서파키스탄 출신의 야히아 칸 대통령은 아와미 연맹의 총선 압승 결과를 무효 처리했고[* 이렇게 한 이유는 인도와 가깝고 교류도 있던 동파키스탄이 자치권을 얻을 경우 친인도 지역이 될것을 우려해서였다.] 이에 반발한 동파키스탄 전역에서 야히아 칸 정부의 총선 무효화에 항의하는 반정부 시위와 소요 사태가 벌어졌다. 한편 동파키스탄 내에서의 소요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 야히아 칸 대통령은 1971년 초 동파키스탄으로 가 무지부르 라흐만 아와미 연맹 당수와 회담을 벌였지만 [[선거]] 결과에 문제가 있어 무효화할수 밖에 없다는 야히아 칸 대통령과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고 새 정부를 당장 출범시키라는 라흐만 당수의 의견 불일치로 회담은 실패로 끝났다. 이제 동파키스탄과 서파키스탄 관계는 갈수록 험악해져 회복되기 힘든 것처럼 보였고, 긴장이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