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치제 (문단 편집) == 즉위 후 == 5세라는 워낙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에 즉위 직후에는 [[함풍제]]의 유언에 의해 숙순을 비롯한 찬양보정팔대신이 섭정을 하였다. [[함풍제]]는 이들과 태후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모든 성지는 어상과 동도당이라는 도장을 찍어야만 효력을 가진다라고 하여 [[동태후]]와 당시 황태자인 재순에게 각각 주었다. 그러나 보정팔대신과 황태후 간에 대립이 심해지고 베이징에 남은 재경대신과 열하에 있는 고명대신 간에 불화로 인하여 [[기상정변]]이 발발하여 삼촌인 공친왕의 도움을 받아 [[함풍제]]의 정식 부인인 [[동태후]]와 생모인 [[서태후]]가 공동 섭정했다. 사실상 실권은 대부분이 어머니 [[서태후]]에게 있었다고 하지만 동태후가 서태후보다 황실에서의 서열이 더 높아 이로 인한 갈등이 있었기에[* 사실 동태후는 온화한 성격이라 권력욕이 강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동태후가 아예 안 나선 것은 아니었다. 대체로 서태후의 말에 동의한 편이었다지만 간혹 두 태후는 충돌했다.] 동치제 즉위 초기의 청나라는 혼란스러운 편이었다고 한다. 또한 두 태후의 갈등은 정치적인 것만이 아니라 동치제 양육 방식 문제도 끼여 있었다. 동치제 본인은 냉정하고 엄격했던 친어머니보다 어리광을 받아주고 절대 혼을 내지 않고 따뜻한 성격의 동태후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이것은 모자간의 사이가 나빠지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 물론 서태후는 자신의 유일한 자식인 동치제를 자식으로서는 많이 생각해주었기에 광서제와 효철의황후에게 했던 것 같은 악랄한 핍박까지는 하지 않았다. 게다가 [[서태후]]가 그의 아내 [[효철의황후]](孝哲毅皇后 阿魯特氏)를 싫어하자, 서태후와 동치제 사이의 거리는 갈수록 멀어져만 갔다. 참고로 안타깝게도 효철의황후 역시 불운했다. 그녀의 아버지 알루터 초치(阿魯特 崇綺)는 동치 4년(1865년)에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장원급제한 [[몽골인]]이었다. 이후 벼슬이 이부상서에 이르렀으며, 동치 11년에는 국구까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출세엔 동태후의 입김이 영향을 미친 거였고, 애초에 시어머니 서태후는 며느리 효철의황후를 싫어했기 때문에[* 효철황후의 생모가 정친왕 단화(鄭親王 端華)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정친왕 단화의 처는 동태후의 고모이기도 하다. 정친왕 단화와 그의 아우 숙순(肅順)은 서태후가 정권을 잡기 전 최대의 정적이었고, 서태후의 권력독점을 저지하였기에 서태후가 그들을 증오했다. 정친왕 단화와 숙순을 제거한 신유정변 이후에서야 서태후는 온전히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 능력과 별개로 초치 역시 서태후의 미움을 샀다. 결국 초치는 추탈되었으며, 효철의황후는 동치제의 요절 이후 동치제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는데도 서태후의 핍박을 받아 거의 유폐된 상태에서 지내게 된다. 그녀는 얼마 후에 금조각을 삼켜서 자살하는데,[* 광서제의 후궁인 진비와 달리 서태후가 죽이지 않은 것은 정실 황후인데다 임신을 하였고 동태후가 살아있었고 반목을 겪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신 중에 금조각으로 자살을 할 정도면 서태후의 핍박이 상상 그 이상으로 심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100년도 되지 않아 군벌 [[쑨뎬잉]] (孫殿英)이 묘를 도굴하여 금조각을 찾기 위해 시체 복부를 갈라 내장을 헤집는 만행을 저질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