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천왕 (문단 편집) == 기타 == * 2000년대 중반 동천왕 벽비, 동천왕 양위 벽비라는 정체불명의 유물이 나왔지만 전부 위작으로 밝혀져서 사료적 가치는 없다. [[https://m.blog.naver.com/yc8663/221031898379|동천왕 11년명 벽비]], [[https://blog.naver.com/xurongzhen/220031922498|또 다른 자료]]. 애초 근래 이전에 사용되지 않는 한자가 쓰인 점을 미뤄보면 20세기에 [[조작]]된 걸로 추정되고 있다. * 동천왕의 친어머니 [[후녀]]는 《삼국사기》에는 '주통촌의 여인'이라고 되어 있는데 유력가가 아닌 일개 촌에서 살던 여자에게서 태어났으니 자연히 동천왕 역시 행동 자체를 조심스럽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금만 수틀리면 반대 세력이 "촌 출신이 설친다."라며 들고 일어날 수도 있었을 테니 말이다. * 동천왕릉은 [[임강총]]으로 추정되는데, 임강총은 국내성 일대 무덤 중 가장 크다. 실제로 가서 보면 '''무덤 규모가 [[장군총]]을 압도할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임강총의 규모에 대해서는 동천왕 개인뿐만 아니라 왕을 따라 [[순사]]한 백성이나 신하들을 한꺼번에 묻어서 이렇게 커졌다는 해석도 있다. * 동천왕이 승하하자 따라 죽으려고 한 사람들 역시 많았다는 것으로 봐서 당시 신민들에게는 꽤 존경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록이 적어서 그렇지 당시에는 [[성군]]으로 제법 존경받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동천왕이 단순하게 나라를 평화롭게 다스리며 번영시킨 타입의 성군이 아니라는 걸 감안하면 저런 존경심은 괴이해 보일 정도이다. 동천왕은 재위 말기, 그러니까 죽기 2년 전에 [[위(삼국시대)|위나라]]한테 괜시리 [[선빵]]을 쳤다가 [[역관광]]을 당해서 [[수도(행정구역)|수도]]인 [[국내성]]-[[환도성]]까지 털리고 동천왕 본인도 죽기 일보 직전까지 몰린 상황에서 어찌저찌 위군이 물러나면서 살아남았다. 한마디로 임금 한 사람의 오판으로 나라가 망할 뻔했는데 위군이 물러가고 나서 동천왕이 승하할 때까지 1년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왕이 전국적인 지지도를 회복했다는 뜻이 된다. 자기 나라의 왕이 옆나라 선빵쳤다 되레 털려가지고 국토가 잿더미가 되고 결국 지키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라가 망할 뻔했다.[* 이는 이전까지의 왕들과 비교해봐도 초라한 실적인데 동천왕 이전의 왕들은 민중왕과 차대왕만 빼면 외치에서의 업적도 있었다. 게다가 차대왕도 태조대왕 시절 왕제 자격으로 후한과의 전쟁에 참전해 승리하여 실적을 쌓았다. 물론 유리왕은 부여의 5만 군대에 위험해졌다가 폭설 덕에 살아났고 대무신왕도 대소왕과 싸우던 도중 위기에 처했으며 산상왕은 아얘 수도가 공격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리왕은 부여의 재침을 막아냈으며 대무신왕은 어쨌든 대소왕을 죽이기는 했고 산상왕도 아들과는 달리 수도는 지켜냈다. 뭔가 외치에서 흠이 있는 이들도 하나 정도는 업적이 있는데 동천왕만은 정말 굴욕을 제대로 당하다가 겨우 살아난 거다.] 그런데도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 왕이 승하할 때 다수의 [[신하]]랑 [[백성]]들이 뒤를 따라 [[자살]]했다는 것이다. 동천왕이 그전에 쌓아온 인덕이 워낙 컸거나 아니면 전후의 수습 기간 동안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해 금방 회복시킨 것이 아니라면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때문에 이때 관련한 [[고고학]]적 발굴 조사나 [[역사학]] 연구가 되어서 동천왕의 내정 관련 자료가 더 발견된다면 평가가 올라갈 가능성도 꽤 높다. * 위나라와 전쟁할 당시 [[밀우]]가 자신을 구하다 다치자 직접 다리에 눕혀 돌보아주었다는 점을 보면, 아랫사람을 잘 봐주는 성격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 역시도 정치적인 면이 있었을지도.[* 이후 실제로 동천왕의 목숨을 구해준 밀우와 밀우를 구출한 유옥구는 식읍을 받는 것으로, 위나라 장수와 동귀어진한 유유는 유유의 아들 다우가 대사자로 임명되는 것으로 보상받기는 했다. 이는 기본적인 논공행상이지만 이것도 제대로 못해 말아먹는 사람도 있는 걸 보면 동천왕에게 기본적인 정치력은 있었다고 봐야 한다.] * 임용한은 이 때 고구려가 위나라를 이기고 요동을 점령했다는 가정을 하면 고구려가 가장 먼저 크게 발전하는 나라가 되었을 거라는 의견을 내놨다. 실제 관구검에게 패배하고 국내성을 빼앗긴 게 꽤 컸는데 이 때 동천왕이 임시로 평양으로 가면서 평양 세력이 커지게 되었고, 장수왕때는 아예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강해진 평양성 세력과 국내성 세력은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도 대립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