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천왕 (문단 편집) === 말년 === 248년 [[신라]]와 화친했고[* 245년 10월 신라 북쪽을 침공한 적이 있었다. 동천왕대 신라 관련 기록은 신라본기 쪽 기록을 고구려본기에 내용만 조금 수정해서 옮겨적은 기록이며, 실제로는 동천왕대 기록이 아닌 4세기 초중반대 기록으로 추정된다. 자세한 내용은 [[석우로]] 문서 참고.] 그 해에 동천왕이 승하하자 [[신하]]나 [[백성]]들이 크게 슬퍼한 나머지 [[순사#s-2|동천왕을 따라 죽으려고 했다]]고 한다. 후임인 중천왕은 이것은 예가 아니라고 금지했지만 결국 장례일에 장지에서 왕을 따라 죽는 백성들이 매우 많았다고 한다. 이때 백성의 [[시신]]들을 죄다 땔[[나무]]로 덮어버려서 동천왕릉이 있는 곳을 땔나무 '시'(柴)를 써서 '시원'(柴原)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王薨 葬於柴原 號曰東川王 國人懷其恩德 莫不哀傷 近臣欲自殺以殉者衆 嗣王以爲非禮禁之 至葬日 至墓自死者甚多 國人伐柴以覆其屍 遂名其地曰柴原. >왕이 죽었다. 시원(柴原)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동천왕이라고 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그 은덕을 생각하며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가까운 신하 중에 자살하여 따라 죽으려고 하는 자가 많았으나, 새 임금이 예가 아니라고 여기고 그것을 금하였다. 장례일이 되어 묘에 와서 스스로 죽는 자가 매우 많았다. 나라 사람들이 땔나무를 베어 그 시체를 덮었으므로, 마침내 그 땅을 시원이라고 이름하였다. >---- >《[[삼국사기]]》 동천왕 22년(서기 248년) 9월조 그 후 아들인 중천왕이 왕위에 올랐고, 아버지의 수난에 화난 중천왕이 위나라 소속의 선비족이 침공해왔을 때 [[양맥 전투]]에서 이를 물리치고, 선비족 8,000여 명의 수급을 베어버리면서 아버지 동천왕의 원수를 제대로 갚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