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천왕 (문단 편집) === 위나라와 충돌하다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비류수 전투)] 치세 초기에는 [[위(삼국시대)|조위]]와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이때 [[오(삼국시대)|동오]]의 [[손권]]이 [[동연]]의 수장 [[공손연]]에게 사신을 보내 [[동맹]]을 맺으려고 했는데, 오히려 공손연은 손권을 배신하고 사신들의 목을 베어 위나라에 보냈다. 이 사신들 중 일부가 탈출하여 [[고구려]]까지 넘어왔는데, 동천왕은 그들을 잘 대접하고 [[보물]]과 호위 무사를 딸려서 오나라로 도로 보내주었다. 죽은 줄 알았던 사신들이 돌아오자 손권은 기뻐하며 공손연 대신에 고구려와 동맹을 맺기로 하고 다시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고, 이때 손권이 동천왕을 '흉노 선우'로 책봉했다. 하지만 [[고구려]]는 234년에 위(魏)나라와 화친하고, 236년에는 [[손권]]의 사신 호위(胡衛) 등을 참수한 뒤 그들의 머리를 유주로 보냈는데 이는 위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확실히 하겠다는 의사표시로 해석된다. 238년 위나라가 공손연(公孫淵)을 포함한 요동의 동연을 [[토벌]]하자 군사 1,000여 명을 보내 위나라를 지원하기도 했다.[* [[신채호]]는 수만(數萬)여 명이라고 주장했다.] 허나 이것은 위나라를 정탐하려는 다른 꿍꿍이로 벌어진 것이었는데 실제 [[공손연]]의 세력이 멸망하고 위나라와 직접 [[국경]]을 맞대게 되면서 고구려와 위나라의 관계는 악화 일변도를 걷게 된다. 238년의 [[중국]]은 《[[삼국지연의]]》로 유명한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로 [[촉한]]의 [[제갈량]]이 234년 사망한 직후였다. 다시 말하면 조위의 기세가 점점 상승하던 시기였다. 명제 [[조예]]는 239년에 죽었고 조위가 촉한에게 완패하는 [[흥세 전투]]는 244년이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동천왕과 관구검이 충돌하던 시점은 조위의 최고 [[전성기]]였던 것이다. 특히 고구려는 공손연 토벌을 지원하고도 위나라한테 받은 보상이 하나도 없다보니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그래서 동천왕은 242년에 위나라 요동의 험요지인 [[단둥시|서안평]]을 선제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때 신하였던 득래가 고구려가 쑥대밭이 될 것이니 단식을 하면서까지 위나라와의 전쟁을 반대했지만 동천왕은 무시하고 위나라 공격을 강행한다. 끝까지 단식했던 득래는 결국 굶어 죽었다.] 이에 분노한 위나라가 244년 8월 유주 자사 [[관구검]]을 보내 고구려를 전격 침공했다. 사실 이 시기는 244년 4월 흥세 전투에서 위나라가 촉한한테 개털린 직후였는데, 당시 위나라 최대의 척신인 [[조상(삼국지)|조상]]이 대대적으로 촉한을 침공했음에도 실패한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위나라가 동북의 고구려를 침공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고구려가 관구검을 격파하는데 성공했지만 이에 들뜬 나머지 관구검을 추격하다가 [[비류수 전투]]에서 처참하게 [[역관광]]을 당했다. 당시 전투를 다루고 있는 많은 책들에서는 동천왕이 "기병이 보병보다 낫다"는 생각에 빠져 위나라 [[보병]]들의 [[기병]]에 대한 전법을 몰랐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 당시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환도성]]까지 내주고 말았다. 고구려는 [[평화]] 시기에는 평지성인 [[국내성]], 전시에는 산성인 환도성을 도읍으로 했는데 이 둘이 가까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환도성을 내줬다는 건 사실상 국내성도 내줬다는 이야기가 된다. 245년 재차 관구검이 밀고 내려오자 동천왕은 북[[옥저]]로 도망쳐야 했다. 관구검은 현도 태수 [[왕기(삼국지)|왕기]](王頎)를 보내 동천왕을 추격했는데 246년에 이르러 동천왕은 [[밀우]]와 [[유유(고구려)|유유]]의 계책으로 위나라의 장수[* 왕기는 고구려 침공 이후로도 활동했기에 이때 죽은 위나라 장수는 왕기의 부하로 추측된다.]를 죽이고 역습을 가해 왕기의 위군을 패퇴시키는데 성공했다. 밀우는 결사대를 조직하여 위군의 추격을 늦췄고, 유유는 >"형세가 매우 위태롭고 급박하나 헛되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신에게 어리석은 계략이 있습니다. 청컨대 [[음식]]을 가지고 가서 위군에 제공하고 틈을 엿보아 저들의 장수를 찔러 죽이겠습니다." 라고 제안하여 적진으로 들어가 적장과 함께 [[동귀어진]]했고 동천왕은 이 틈을 타 수습한 병력으로 위군을 공격하여 무찌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환도성으로 돌아오자 성은 이미 폐허로 변해있어서 도읍을 임시로 [[평양성]]으로 옮겨야 했으며 [[태자]]인 [[중천왕]]이 [[왕위]]에 오르고서야 다시 국내성으로 환도했다. 이 평양성이 평양에 있는 [[대성산성]]이라는 주장 등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일단 우리가 아는 평양은 아닐 가능성이 높은데 그 당시 이 지역은 [[낙랑군]]의 영역이었던 데다가 이름도 평양이 아니라 조선현(朝鮮縣)이었다.] 동천왕 때 큰 피해를 입은 고구려는 70여 년 후 위나라의 뒤를 이은 사마씨의 [[서진]]이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으로 혼란에 빠진 [[미천왕]] 시기인 313년에 비로소 서쪽의 서안평, 남쪽의 낙랑군과 대방군 등을 공격해 싸그리 집어삼키면서 확실히 앙갚음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