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천왕 (문단 편집) === 즉위 === 227년 5월,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21년간 재위하였다. 적어도 이때부터는 아명 교체(郊彘) 대신 우위거(憂位居) 또는 위궁(位宮)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동천왕 시기부터 부자 세습이 확립되기 시작한다'''.[* 사실 부자 상속이 정해진 시기는 이보다 전대인 [[고국천왕]] 때였으나, 고국천왕 본인부터가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승하한 탓에 또 한 번 왕위 계승 다툼이 벌어져 동천왕의 부왕이자 고국천왕의 셋째 동생인 [[산상왕]]이 왕위를 잇게 된 것이었다.] [[중천왕]](동천왕의 장남) → [[서천왕]](중천왕의 차남) → [[봉상왕]](서천왕의 장남) 순으로 부자 간의 세습이 이어졌다. 그 후 봉상왕 → [[미천왕]]은 질백 간의 세습이지만[* 이는 봉상왕은 폐위된 군주이며 그의 동생 [[돌고]]의 아들인 미천왕이 추대되었기 때문이다.] [[미천왕]] 이후 아들 [[고국원왕]]부터는 모두 직계로 세습되어 쭉 그의 후손들이다. 아무래도 정실 왕후가 아닌 소후의 소생이다 보니, 228년 3월 왕태후(王太后)로 봉해진 [[왕후 우씨]]가 234년 9월 사망하기 전까지는 눈칫밥을 먹으며 살아야 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어느 날 왕후가 동천왕의 심성을 시험해보고자 왕이 외출했을 때 사람을 시켜 왕이 타는 말의 갈기를 자르게 했는데, 동천왕은 돌아와 "말이 갈기가 없으니 가련하구나."라고 말하며 대충 넘겼다고 한다. 동천왕에게 수라를 올릴 때에도 우씨가 시종에게 일부러 동천왕의 옷에 국을 엎지르라고 명령했을 때도 [[나는 관대하다|역시 화를 내지 않을 만큼 성품이 관대하고 인자했다고 전한다.]] 후일 동천왕은 자신에게 했던 모든 행위의 배후에 우 왕후가 있음을 알게 되었음에도, 오히려 왕태후의 예로 모셨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