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천왕 (문단 편집) === 출생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동천제-대한민국역사복원협회.jpg|width=50%]]}}} || || 대한민국역사복원협회의 이대선 회장이 그린 동천왕. || 때는 203년 3월, [[산상왕]]은 후계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에게는 본래 처자식이 있었으나, 형 [[고발기#s-3]]가 197년 5월 왕위 계승권 문제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자세한 사항은 [[고발기#s-3]] 문서 참조.] 모조리 몰살되어 더 이상 왕위를 이을 자가 없게 된 것이었다. 산상왕은 할 수 없이 산천에게 기도를 올리며 [[왕후 우씨]]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던 3월 15일 밤, 산상왕은 꿈에서 하늘에게 "내가 너의 [[소후]]로 하여금 아들을 낳게 할 것이니 걱정 말라"는 계시를 듣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산상왕에게는 정실인 왕후 우씨가 있을 뿐 소후는 없었으므로, 잠에서 깨어난 왕은 이를 이상하게 여겨 좌우 신하들에게 어찌해야 하는지 물어보았다. 이때 국상 [[을파소]]는 "하늘의 뜻은 예측할 수 없으니 왕께서는 기다리십시오."라며 적절하게 대답하였다. 동년 8월 을파소가 사망하였고, 그렇게 장장 5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산상왕은 여전히 아들을 가지지 못했다. 208년 11월, 제사를 위해 잡아두었던 [[돼지]]가 우리 밖으로 달아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담당자는 돼지를 쫓아 주통촌(酒桶村)까지 이르렀음에도 잡을 수 없었는데, 이때 얼굴이 아름답고 요염한 20대 여인 [[후녀]]가 나타나 앞장서 돼지를 포획하였다. 이 기묘한 소식이 산상왕에게 전해지자, 그는 이를 아들을 얻을 수 있는 기회라 여겨 후녀와 만나고자 했다. 결국 왕은 한밤중에 신분을 감춘 채 후녀의 집 앞에 도착한 뒤 시종을 보내 알리게 했는데, 그 집에서는 왕이 온 것을 직감하여 감히 거절하지 못하였다. 산상왕이 방에 들어가 후녀를 불러서 교제하려고 하자, 후녀는 "대왕의 명을 감히 피할 수 없으나, 만약 다행히 자식이 생기면 저를 버리지 마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산상왕은 이를 허락하였고, 그렇게 둘만의 시간을 보내다가 자정 무렵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 [[국내성]]에 있는 왕궁으로 돌아갔다. 정실 왕비인 [[왕후 우씨]]는 이듬해인 209년 3월이 되어서야 남편이 주통촌 여인과 만났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를 질투하여 몰래 자객을 보내 [[후녀]]를 암살하고자 하였다. 우씨의 군대가 추격해오고 있음을 알게 된 후녀는 [[남장|남자의 옷으로 변장]]하고 도망쳤는데, 결국 군대와 맞닥뜨리게 되자 다음과 같이 일갈하였다. >爾等今來殺我, 王命乎, 王后命乎. 今妾腹有子, 實王之遺體也. 殺妾身可也, 亦殺王子乎. >너희들이 지금 와서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왕의 명령이냐, 왕후의 명령이냐? 지금 내 뱃속에 아이가 있는데 실로 왕이 남겨준 몸이다. 내 몸은 죽일 수 있으나 왕의 아이까지 죽일 수 있겠느냐? 병사들은 후녀가 왕의 아들을 [[임신]]하고 있음을 깨닫고, 감히 그녀를 해치지 못하여 왕후에게 돌아와 보고했다. 한편 [[산상왕]]은 이참에 후녀를 다시 만나 누구의 아이를 배었냐고 물었는데, 후녀는 "평생 [[형제]]와도 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감히 다른 성씨의 남자를 가까이 했겠습니까"라며 임신한 아이가 산상왕의 친자임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이를 기특히 여긴 산상왕은 위로와 증여를 한 뒤 돌아가 왕후에게 소식을 전했다. 암살에 실패한 [[왕후 우씨]]는 성질이 뻗쳐서 후녀를 반드시 죽이려고 했으나 결국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 후녀는 6개월이 지난 209년 8월에 마침내 아들을 낳았는데, 산상왕은 "하늘이 나에게 대를 이을 아들을 준 것"이라며 기뻐하였다. 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난 일로 말미암아 후녀를 만나게 되었다는 점에서 착안하여 아이의 이름을 교체(郊彘)라 하였고, 후녀를 [[소후]]로 삼았다. 뒤늦게 밝혀진 사실로, 후녀의 어머니가 후녀를 임신하고 있을 적에 [[무당]]이 점을 쳐서 반드시 왕후를 낳을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후녀(后女)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산상왕과 후녀의 만남은 이미 하늘에 의해 예견되어 있었다는 논조의 기록이다. 교체는 4세가 되던 213년 1월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15세 전후의 나이였던 224년에는 왕손 [[중천왕|연불]]을 낳았다. 《[[삼국지(정사)|삼국지]]》 〈동이전〉에서도 "[[산상왕|이이모]](伊夷模)가 아들이 없어 관노부(灌奴部)의 [[후녀|여자]]와 사통하여 아들 위궁(位宮)을 낳았다"고 하여 간략하지만 비슷한 출생 배경을 전하고 있다. 또한 삼국지에 따르면 동천왕은 용감하고 힘이 세었으며, 말을 잘 타고 [[사냥]]에서 활을 잘 쏘았다고 한다.[[https://db.history.go.kr/id/jo_004r_0010_0030_012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