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정항일 (문단 편집) === 홍군의 퇴각 === 사태가 이쯤되자 마오쩌둥과 정치국 및 군사위원회도 섬북으로 퇴각하는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였다. 이때 공산당이 동북군과 섬서군을 상대로 한 정치공작이 주효했는데 중앙 혁명군사위원회 통일전선공작 책임자인 2국 국장 [[리커눙]]을 동북군 67군 군장 왕이철에게 파견하여 장쉐량과의 회견을 요청하는가 하면 공산군이 포위하고 있던 감천 지역의 포위를 풀어 동북군에게 적대감이 없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에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67군을 동원해 감천에서 홍군 300명을 사살했다고 거짓보고를 올리는 등 장제스를 속이고 공산군과 협상하여 섬북에 대한 공격을 실행하지 않았다. 이는 장쉐량이 얼마 전에 있었던 초공작전에서 3개 사단을 잃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초공에 매우 혐오감을 드러내는 상황과 맞물린 결과였다. 장쉐량은 4월 4일, 낙천에서 초비회의를 열겠다는 구실로 낙천으로 이동하여 리커눙과 비밀리에 회담하였다. 그 사이에 1야전군과 공산당 지도부는 섬서성 근거지로 철수하여 4월 말 즈음에 모두 돌아왔다. 한편 1군 사령관 [[린뱌오]]는 동정항일 기간 동안 15군을 제대로 지원하지 않아 류즈단 등의 전사를 야기한 책임을 지고 1야전군 사령관에서 해임되어 육군대학 교장으로 전임되었다. 섬서로 돌아온 마오쩌둥은 5월 3일 정치국 회의를 소집, 동정항일의 종식을 선언하고 1야전군 내부의 불화를 진압하였다. 이 회의에서 오토 브라운은 마오쩌둥의 기동전략을 찬양하며 정치국이 자신에게 가한 비판이 옳았다고 자아비판을 해야 했고 대신에 마오쩌둥도 후방에 남아있던 오토 브라운이 국민정부군 민병기병대의 습격에 맞서 취한 조치가 훌륭했다고 칭찬했다. 뤄푸, 왕가상 등도 마오쩌둥의 전략을 초반에 찬성하지 않았던 것을 자아비판하며 마오쩌둥을 칭송했으나 1군 사령관에서 쫓겨난 린뱌오는 시종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이어 마오쩌둥은 <난징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전육해공군, 각 당파, 각 계층, 각 조직, 각 신문사, 노예적 식민지의 사슬을 이 이상 짊어지기를 원치 않는 국민에 대한 중국 홍군으부터의 전문>, 소위 <5.5 통전>을 보내 자신들의 퇴각은 내전을 피하여 항일세력을 보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자화자찬한 후 장제스를 장제스 씨로 호칭하며 1개월 이내에 정전화의를 행하여 항일 통일전선을 결성할 것을 제안했다. 이는 군사력으로는 국민정부를 상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마오쩌둥의 깨달음이 낳은 결과였다. 한편 마오쩌둥은 장쉐량, 양후청에 대한 정치적 침투를 강화하는 한편 항일근거지 확보를 구실로 서북의 마씨 군벌 및 [[후쭝난]]에 대한 공세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여 영하, 감숙으로의 서정을 실시했다. 이는 [[장궈타오]] 산하의 4야전군과 2군과의 접촉 및 소련과의 직접 연락도 염두에 둔 것이었는데 어느 정도 전진하는데는 성공했으나 대단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