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정항일 (문단 편집) === 동정의 개시 === 2월 중순, 중국 공산당은 출정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1야전군 총사령부에 합류하라는 지시를 받은 오토 브라운은 마오쩌둥의 의도가 몽골을 점거하여 새로운 혁명 근거지로 삼으려는 것이라 추측하고 정치국에 편지를 써 마오쩌둥의 새로운 전략은 소련의 평화정책을 위협하는 것이며 일본이 외몽골을 공격할 구실을 제공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현재 중국 공산당은 소련의 군사원조를 얻는 것보다는 광범위한 항일연합전선을 수립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번 원정은 그것에 부합하지 않음을 지적했다. 또한 펑더화이의 견해를 인용해 이번 원정으로 자칫하면 섬서성의 근거지마저 잃을 수 있다고 보았다. 오토 브라운은 저우언라이에게 서신을 전달하여 이를 정치국원들에게 배부해달라고 부탁했으나 그것이 실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회고하고 있다. 결국 오토 브라운은 동정항일에서 제외되어 와요보에 잔류했으며 정치국은 오토 브라운이 기회주의 태도를 보이며 소련의 평화정책을 오판하고 상대방의 힘을 과대평가하고 있으며 홍군과 공산당의 힘은 과소평가했다고 맹렬하게 비난했다. 2월 20일, 홍군은 새로이 편성된 28군과 29군 및 지방유격대를 후방에 남겨둔 후 나머지 주력을 이끌고 [[양후청]]의 국민혁명군 17로군이 점령하고 있던 의천(冝川), 수덕(綏德) 두 도시 사이의 간격을 횡단하여 황하를 도하했다. 이 지역에는 약간의 산서군 외에는 병력이 없었기 때문에 순조롭게 전진할 수 있었다. 2월 21일, 마오쩌둥은 동정항일을 선언하고 "도적일본에 대한 저항과 화북자치 정책에 책임이 있는 반역자의 징벌"에 목표가 있다고 선언, 1야전군을 항일전위군으로 개칭한 후 펑더화이를 사령원으로, 마오저둥을 정치위원에 임명하여 산서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5군이 황하 도하지점을 확보하고 전군의 좌익을 타이위안에 집결한 옌시산 군의 주력부대로부터 엄호하는 사이 1군이 하곡 지대까지 진출하여 공산당 행정기관을 설치한 후 대대적으로 지원병을 모집하였는데 그 수가 5~6천이 되었다. 또한 부농, 상인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약탈을 벌여 50만 멕시코 달러에 달하는 군자금을 확보하였다. 여기에 쌀, 소금, 기름을 비롯한 식량과 옷가지, 약간의 무기도 노획했다. 저우언라이가 병참기지를 건설하자 [[마오쩌민]]이 책임자를 맡았다. 2월 22일, 공산군은 중양과 석루현성을 포위 공격하였으며 이석, 습까지 진출하는 등 쾌속으로 전진을 계속하였다. 옌시산은 일단 전면에 나서지 않고 주력부대를 타이위안에 집결, 오보(吳堡)와 분하(汾河)를 잇는 가도를 수비하는 방어적인 전략으로 나왔다. 3월 하순, 중앙정치국은 진서회의를 개최하여 군사전략방침을 논의한 후 더 이상 홍군을 따라 행동하지 않기로 결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