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이 (문단 편집) === 동이 교위 설치기 === 이후 [[요동]]군에 설치되었던 동이교위(東夷校尉)의 존재는 중국에서 바라보는 '동이'의 개념이 어떠한 것이었으며 어떻게 바뀌었는지 보여주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동이 교위가 처음 설치된 시기에 대해서는 한나라가 [[선비족]]을 위무하기 위해 동이 교위를 두었다는 기록과 위나라가 [[공손도|공손씨]] [[공손강|일족]]과 관련해 동이 교위를 두었다는 기록이 상충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전자와 후자를 절충하여 [[조조]]가 답돈을 정벌하고서 [[원상]]과 [[원희]]의 수급을 보내온 [[공손강]]을 좌장군 양평후로 책봉하면서 동시에 선비족을 비롯한 주위 이민족들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의미에서 동이 교위라는 관직을 만들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동이라 총칭되는 각 나라들과의 중개와 교섭은 그에 해당하는 각각의 [[한사군|동방변군]]이 나누어 맡고 있었고,''' 따라서 그에 해당하는 영향력을 행사하던 공손씨 일족이 [[사마의]]에게 멸문당하자 동이교위는 단순히 유명무실한 직함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실제로 동이 교위가 설치되었다는 한나라 말은 물론 위나라 시대까지도 기록상으로 동이교위가 임명되거나 활동하는 모습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 '''변군''' || '''통어하는 종족''' || || 요동속국 || 오환 분파 || ||<|2> 현도군 || 부여 || || 고구려 || || 요동군 || 선비 분파 || ||<|3> 낙랑군 || 옥저 || || 동예 || || 진한 || ||<|3> 대방군 || 마한 || || 변한 || || 왜 || 이러한 동이 교위가 실질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서진]]이 건국되고 [[삼국통일]]이 이루어진 뒤 체제를 정비하던 태강 연간의 일이다. 이 시기 [[사마염]]은 282년에 서이교위(西夷校尉), 284년에는 남이교위(南夷校尉)를 신설하여 운남 일대의 이민족들을 관장하도록 하고 289년에는 서융교위(西戎校尉)를 신설하는 등 여러 이민족 통어관을 설치하고 있었는데, 이 와중에 동이 교위에게도 실질적인 힘이 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동이 교위가 사료상에 대두되는 것은 285년에 선우영(鮮于嬰)이 [[모용외]]가 [[부여]]에서 깽판을 치는데도 가만 보고 있었다는 죄목으로 해임되고 하감(何龕)이 부임하면서부터의 일이었다. 뒤이어 부임한 하감은 독호 가침을 보내서 부여를 재건시켜 주었고, 나중에는 모용외에게 항복까지 받으면서 이 시기 동이 교위의 위세는 절정을 달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