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이 (문단 편집) === 선진시대 === >은나라의 탕왕이 혁명을 일으키고 나서 이들을 정벌하여 평정하였는데, 중정(仲丁) 대에 이르러 남이(藍夷)가 침구하였다. 이로부터 혹은 복종하고 혹은 배반하길 삼백여 년이었는데, 무을(武乙) 대에 국세가 기울자 동이가 점차 강성해져 마침내 회하와 태산으로 나누어 옮겨오니 중토(中土)에 점차 살게 되었다. >----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jo&setId=879187&position=0|『후한서』 동이열전]] 이미 위에서 언급한 대로 동이는 본래 인방(人方)이라 불리던 산동성과 안휘성 일대의 자생 소국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들은 문헌상으로 [[하나라]] 시대에 해당하는 기원전 20~15세기부터 중원의 얼리터우 문화(二里頭文化)와 구분되는 웨스 문화(岳石文化)를 독자적으로 영위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두 지방은 지속적으로 충돌과 갈등을 겪게 되었는데 [[죽서기년]]에는 하나라 시절부터 이미 중국이 회이(淮夷), 견이(畎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황이(黃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현이(玄夷), 풍이(風夷), 양이(陽夷) 등 수많은 동이 족속들과 접촉하면서 정벌과 교섭을 반복했음이 전해진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중국 신화]]에도 반영되어 한족을 대표하는 [[황제(중국 신화)|황제]]와 그에 맞서는 [[염제]], [[형천]], [[치우]] 등의 투쟁에 모티브가 되었다고 이해되기도 한다. 다만 [[하나라]]는 고고학으로는 부정적이며 [[삼황오제]] 후가 바로 [[상나라]]라고 추정되고 있다. 무엇보다 당시 [[황하 문명]]은 [[마야]]나 [[아즈텍]]처럼 밀림에서 형성된 문명권으로 씨족이나 [[부족]], [[성읍국가]] 단위로 자신들을 구별했다. 이후 보다 엄밀한 의미의 국가라고 할 수 있는 [[상나라]]가 들어서면서 동이와 화하 사이의 갈등은 한층 격화되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갑골문을 보면 인방(人方·尸方)에 대한 정벌 기사가 무려 65번이나 나오는데, 실질적으로 갑골문이 출토된 시기가 [[은허]]에 도읍한 상나라 후기의 300년 정도라는 것을 생각하면 빈도상으로도 결코 무시하지 못할 수준. 특히 그 중에서도 산동반도 남부에 있던 차(虘)가 주요 공격 대상이었다. 갑골문 해석에 따라 동이의 개념은 [[상나라]]가 최초로 만든 것이 확인되었다. 즉 최초의 동이는 상나라 입장에서 동쪽의 이민족 전반을 자칭하는 말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마냥 싸우기만 했던 것은 아니고 회합이나 책봉과 사여와 같은 상당히 다채로운 외교 활동이 각국을 상대로 벌어졌던 것으로 확인된다. 하지만 [[상나라]]의 [[아즈텍 제국]]스러운 [[인신공양]]과 [[식인]] 풍습을 생각할 때 근본적으로 사이좋게 지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민족들과 전쟁해서 엄청나게 잡아다 바치고 여차하면 자기들끼리도 무지 많이 바쳤다고 나오는데, [[아즈텍 제국]]에게 인간목장 취급받던 [[틀락스칼텍]]을 비롯한 부족들이 불만을 품고 훗날 [[에르난 코르테스]]를 적극적으로 도와 아즈텍을 멸망시킨 걸 생각해보자. '''상나라의 마지막 왕 [[제신]]이 대단히 적극적으로 동방 정책에 나섰는데,''' 위에서 말한 65건의 정벌 기사 가운데 반이 넘는 46번이 이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 심지어 이는 사서상으로도 남아서 그로부터 500여 년이나 지난 [[춘추전국시대]]에도 주왕이 동이를 정벌하다가 신세를 망쳤다며 경고하는 문장이 등장하고 있을 정도였다. 때문에 갑골문을 연구한 학자들은 [[목야대전|상주혁명]]의 실체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주왕과 [[달기]]가 폭정을 해서가 아니라, [[상나라]]가 동이와의 전쟁에 매진하는 사이 서방에 있던 제후국 [[주나라]]가 [[강족]] 등의 이민족들을 모아 상나라를 기습하여 상이 멸망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오거(伍擧)가 "무릇 6왕과 2공의 사적은 모두 제후들에게 예법을 보여서 제후들이 그 명령을 받든 것입니다. 하나라 걸왕이 잉(仍)에서 회합할 때 유민(有緡)이 반란했고, 상나라 주왕이 여(黎)에서 사열할 때 동이(東夷)가 반란했고, 주나라 유왕이 대실(大室)에서 회맹할 때 융적(戎狄)이 반란했으니, 모두 제후들에게 교만을 보여서 제후들이 그 명령을 내버린 것입니다. 지금 임금님께서 교만하시니 성공하지 못할 듯합니다."라고 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 >[[http://ctext.org/dictionary.pl?if=gb&id=19910|『춘추좌씨전』 소공 4년]] ---- >숙향(叔向)이 대답하길 "이깁니다. …… 걸왕이 유민을 이겼으나 그 나라를 잃었고, 주왕이 동이를 이겼으나 그 신세를 망쳤습니다. 초나라는 그들보다 작고 낮은데도 걸왕과 주왕보다 더 난폭하니 재앙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늘이 착하지 않은 자를 거짓으로 도와주는 것은 복을 내리는 것이 아니고, 그 흉악함을 더 쌓도록 해서 벌을 내리려는 것입니다."라 하였다. >---- >[[http://ctext.org/chun-qiu-zuo-zhuan/zhao-gong-shi-yi-nian/zh#n20032|『춘추좌씨전』 소공 11년]] 아무튼 이렇게 [[상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들어선 이후에도 동이는 여전히 주나라에 위협적인 존재로 남아 있었고, 더욱이 상나라의 잔당과 연합하면서 더욱 큰 문젯거리가 되었다. 주나라는 제신의 아들 무경을 제후로 책봉하여 [[상나라]]의 사직을 보존시켜 주는 대신 그 주위의 관(管), [[채]](蔡), [[곽]](霍)에 친족들을 분봉하여 이를 감시하도록 했는데, 그로부터 2년 만에 [[무왕(주)|주 무왕]]이 죽고 어린 [[성왕(주)|주 성왕]]이 즉위하여 [[주공단|주공 단]]의 섭정을 받게 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관숙과 채숙이 오히려 무경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버린 것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반란에 제법 작심해서 지금의 안후이 성 일대의 회이(淮夷)와 [[서융]](徐戎)까지 끌어들였지만 주공은 3년 만에 가까스로 이들을 진압하고 동방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이후로도 주나라와 동이 사이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주공은 다시 동이에 대한 정벌에 박차를 가하여 지금의 산둥 성에 있던 엄(奄)을 몰아낸 뒤 그 땅을 자신의 봉지인 [[노나라]]로 삼았고, [[강태공]] 또한 이와 비슷하게 [[내|래]](萊)[* 청동기 명문에 따르면 래는 제나라와의 전쟁 이후 주나라의 세력권에 복속되어 다른 이민족들을 정벌할 때 주력으로 동원되는 등 주나라에 비교적 우호적인 세력이 된다.]를 몰아내고 그 땅을 자신의 봉지인 [[제나라]]로 삼았다. 이 나라가 [[춘추오패]] 중 하나이자 [[산둥 반도]]를 중심으로 세력을 떨친 제나라다. 애당초 [[서주]] 시대 초기에 봉해진 제후들은 '이미 완전하게 영토로 확정된 곳'을 받은 것이 아니라 '가서 그 지방을 정복하고 살아라'라는 개념에 가까웠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곤 했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서주 중기까지 동이의 판도는 계속해서 축소되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 집단은 회하 유역을 중심으로 건재하고 있었고 그 가운데 가장 강성했던 [[서]](徐)나라는 아예 그 일대 동이의 우두머리로 '''왕을 자칭하면서 중원 한복판까지 침범해 들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춘추전국시대]]가 전개되면서 각국이 경쟁적으로 확장을 개시함에 따라 동이라 불리는 소국들이 존속할 수 있는 여지는 점점 더 좁아졌다. 단적으로 산동 반도에 있던 래(萊)는 기원전 567년에 제나라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였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초(춘추전국시대)|초나라]]를 필두로 한 남방 국가들의 북진이었는데, 초나라는 회하를 따라 동진하면서 육(六)과 주래(州來)와 [[거]](莒)와 같은 소국들을 합병하였고, 이어서 흥기한 오나라와 월나라는 북진하면서 서(徐)와 [[담]](郯) 같은 동이의 핵심 국가들을 멸망시키고 자신의 판도 안으로 편입하였다. 남방에서 밀고 올라온 [[초(춘추전국시대)|초나라]]를 비롯한 남부 나라들은 본래 [[장강]] 문명권이라는 [[황하 문명]]과 별개의 문명 출신이라 이민족이었으며, [[초(춘추전국시대)|초나라]]는 [[묘족]]에서 기원했기 때문에 남쪽 원숭이들로 멸시당해야 했다. 우스운 건 [[초한쟁패]]를 연 [[항우]]와 [[전한|한나라]]를 건국하고 [[한족]]의 이데올로기를 최초로 형성시킨 [[고제(전한)|유방]]은 모두 초 출신이다.[* 이런 경우는 역사에서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로 [[프랑스인]]이라는 정체성을 확립시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만 해도 [[코르시카]] 출신의 하급 귀족이었고, [[이탈리아 반도]] 통일을 기치로 내걸고서 정복 전쟁을 벌임으로써 [[이탈리아인]]이라는 단일 민족집단으로의 정체성을 일깨워 주었다고 평가받는 [[체사레 보르자]]도 [[스페인인]]이었다.] 이후 이 지역들은 [[월나라]]가 망하고 [[초(춘추전국시대)|초나라]]의 영역이 되었다가 천하 통일 이후 [[진(통일왕조)|통일 진 제국]]의 치하에서 전 중국에 일괄적인 군현제로 편성되었고, 이로 말이암아 새로운 의미의 중국 관념이 대두되면서 더 이상 이민족으로 인식되지 않게 되었다. 이 방면이 원래 동이의 땅이었다는 인식은 [[신나라]]에서 이곳의 일부를 관할한 낭야군의 이름을 진이군(塡夷郡), 즉 '동이를 진압한 군'으로 바꾼 것에서 그나마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진(秦)이 6국을 병합하고 그 회수와 사수의 이족들을 모두 흩어서 민호로 만들었다. >----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jo_003r_0010_0010_0050|『후한서』 동이열전 서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