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연 (문단 편집) == 상세 == 중국이 후한 말의 난세로 혼란한 틈을 타 요동 지역에서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했으며, 중국 동북부의 이민족을 관리했다. 스스로 왕을 칭하기도 했으며, 거의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렸으나 결국 238년 [[위(삼국시대)|위나라]]의 [[사마의]]가 이끄는 군대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이 공격에 [[고구려]] [[동천왕]]이 군대를 지원했다. 실제 목적은 위나라 군대를 탐색하는 것이었고 이후 동연이 몰락하면서 [[완충지대]]가 사라져 자연스레 사이가 악화된다.] 같은 [[공손]]씨지만, 후한 말에 유주를 중심으로 할거했던 [[공손찬]]과는 관련이 없다는 게 특기할 만한 점. 사실 동연이 자리잡았던 요동 지방에는 '제후의 후손'이라는 뜻의 '공손(公孫)'씨를 쓰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성씨는 같지만 본관이 다른 것. 간단히 말해 한국의 수많은 김씨, 이씨와 같다고 보면 된다. 성이 같다고 반드시 혈연적으로 연관이 있는 건 아니었다는 것. 공손도를 양자 취급했던 집안도 공손씨이고, 공손도를 벼락출세한 놈 취급하고 공손강을 하인처럼 부렸던 것도 공손씨인 공손소다. 물론 공손강이 공손도의 뒤를 이어 요동 태수가 된 다음에 곧바로 공손소를 처형시켰다. [[한국사]]와도 꽤 많이 엮인다. [[요동군]]뿐만 아니라 그보다 동쪽에 있는 [[현도군]]과 [[낙랑군]]까지 판도에 넣고 있었기 때문. 물론 현도군과 낙랑군의 명목상 종주권자는 요동군 태수인 동연의 수장이 아니라 후한에게 선양받은 위나라의 황제였지만, 실제로는 요동군 태수에 불과한 동연의 집권자가 행정 구획 변경 및 태수 임명을 자행하면서 실질적인 세력가로 군림하였다. 자꾸 [[고구려]]가 침공해오고 인구가 [[삼한]]으로 빠져나가는 흐름이 계속되자, 나눠서 관리를 쉽게 하고 삼한에 대한 통제력을 보다 높여보기 위해 보다 남쪽에 있던 낙랑군의 대방현 외 6개 현을 나누고, 그 전까지 토착 예맥계 호족들의 저항 탓에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던 옛 진번군 영역을 통합해 [[대방군]]을 신설하기도 했다. 고구려와 위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공손도의 종가 딸(宗女)과 [[부여]]의 [[위구태#s-2|위구태왕]] 사이에서 혼인 동맹이 맺어지기도 했다. 기록을 보면 [[산동]] 반도 방면으로의 진출도 꾀했던 것으로 보이나 [[원소]]가 원담을 파견해 청주를 장악하게 한 시점에서 잃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10대 [[산상왕]] 시기 고구려 왕위 계승 전쟁에서 [[고발기]]를 지원하면서 고구려의 내정에도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해 보았지만 고발기가 패배하면서 시도에만 그쳤다. 고구려나 위나라와는 대조적으로 선비족과 적대 관계를 형성하지 않고, 오히려 유화책을 폈기 때문에 요동 공손씨 세력을 [[한화#s-3.1]](漢化)한 선비족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진위는 불명이다. 공손씨 일족이 몰살당한 후 요동은 조위와 서진의 지배를 거쳐 [[모용선비]]의 땅이 되었다. 동연과 관련된 유적들은 의외로 많은 편이다. 요서, 요동, 산동 지역에서 후한 중기부터 나타나는 석판으로 벽을 만들고 여려 공간 구성을 갖추고 벽화를 장식한 석판묘들이 그것이다. 요서, 요동, 산동에서 주로 확인되고 있으며, 확인된 석판묘는 약 100여 기에 달하는데, 그 중 대부분이 요양에서 확인된 것이며 시기적으로도 동연의 존속기간과 일치하는 것이 많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요양 삼도호, 남환가, 상왕가촌 고분군 등이 있다. 북한의 [[안악 3호분]]도 묘제의 유형 상으로는 석판묘에 해당하며, 천정구조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일단 이 동연은 전성기 기준으로 판도를 따지면, 전국시대 연나라에게 패배하여 요동과 청천강 이서 일대를 잃기 전의 [[고조선]]과 거의 강역이 비슷하다. 꽤 이목이 쏠리는 부분인데 다른 점이 있다면 요동 동부의 변경 일대가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었고, 영역 자체에 대한 장악력 및 통제력은 연맹 체제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원전 4~3세기 이전 고조선보다 강했다는 것뿐이다. 다만 설령 그랬다고 하더라도 그 고조선조차 국력이 조위보다 훨씬 딸렸을 전국 시대의 연나라에게 결국은 밀려났는데, 동연은 도대체 뭘 믿고 조위에게 항거하는 선택을 하고 말았는지 의문이다. 고조선은 그나마 연나라 외에는 다른 적수가 없었으나, 동연은 고구려와 관계가 전반적으로 최악이었고 삼한과도 그다지 관계가 원만한 편이 못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