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동아시아 (문단 편집) == [[역사]] == [include(틀:동아시아의 역사)] [include(틀:영상 정렬, url=12U3yLR_EeM)] [[황하 문명]]부터 시작해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비할 바 없이 크며[* 이 지역 문명의 근간이 되는 각종 학문의 전부가 [[중국]]에 의해 주변 지역에 전파되었다. 학문뿐만 아니라 [[종교]]와 전근대 시기의 정치체제, 문화양식도 중국이 본진이거나 전파자 역할을 한 경우가 절대 다수.], [[유목민족]]이 긴 세월 중국 북부(남부까지 차지한 유목 민족은 [[몽골 제국]]과 [[청나라]]뿐)를 차지하기도 했지만 몽골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목제국들이 압도적인 인구풀을 자랑하는 중국에게 문화적, 혈통적으로 흡수되거나 장기적으로 동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주변국들 또한 [[당나라]] 이래 중국식 [[율령제]]를 받아들였기에[* 이는 [[동남아시아]]의 [[베트남]]도 해당된다.] 동아시아 밖의 국가에서는 중국사의 비중을 매우 높여 동아시아사를 공부한다. 사실상 세계사적 측면에서 볼 때 동아시아의 중심은 곧 중국이다. [[한국]], [[일본]], [[베트남]] 등은 중국에 편입되지 않고 독립했고 [[조공]]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전통의 외교 체제와 각종 전투 및 전쟁 등의 교류를 통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다 형성되어 발전된 주변부 지역이라 보면 된다. 예컨대 [[라틴어]] 문명권은 [[21세기]]인 현재까지도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포르투갈]] 등등 다양한 국가들로 분화되어 발전해 왔으므로 그 중심 국가를 하나만 지칭하는 것이 어렵다.[* 굳이 따진다면 적통, 즉 라틴 문명권과 라틴어의 맏아들은 [[이탈리아]]이긴 하지만 [[르네상스]] 기간을 제외하곤 중세부터 현재까지 [[프랑스]]가 이탈리아보다 권역 내의 영향력에서 더 압도해왔으며, 중근세 시절 [[스페인]]과 [[포르투갈]] 역시 [[식민지]] 개척을 지속하며 이탈리아 이상의 국력을 꽤 오랜기간 선보인 국가들이다. 즉, 각자 국가들의 팽팽한 라이벌 관계로서 서로 영향을 비등하게 주고받았을 뿐, 동아시아의 중국처럼 최고 자리에서 '큰형님'처럼 군림해온 개념과 거리가 멀다.] 그러나 [[한자 문화권]]은 거대한 통일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서구에 비해 훨씬 크다. 많은 사람들이 전 세계를 통틀어도 유서깊은 역사를 가진 곳이라 동아시아를 오해하는 것과 다르게, 이 지역은 사실 지정학적으로 후발주자에 가깝다. 우선 세계 4대 문명 중에 가장 늦은 문명이며, 세번째로 생긴 인더스 문명과의 차이도 1,000년 정도로, 기간차가 절대 작은 수준이 아니다. 유럽 최초의 문명인 [[에게 해]]의 [[그리스]]계 문명과 비교해도 1,000년 정도 늦었다. 사실상 구대륙 주요 문명권들 중에서 제일 늦게 등장한, 막내뻘 문명인 셈이다. 문명권이 생긴 이후 한동안은 인구 면에서도 그렇게 대단하다고 보기 힘들었던 것이, 인류의 문명이 처음 형성된 곳이라 불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가나안]] 포함)은 물론 [[인더스 문명]]도 동 시기에 더 거대한 인구를 먼저 형성했기 때문이다. 이는 인류의 기원 및 이동 경로와 어느 정도 연관이 있는데,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호모 사피엔스]] 무리들이 가장 먼저 정착한 지역이 지금의 서아시아 지역이었으며, 이곳을 기점으로 서쪽과 동쪽으로 퍼져나갔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거리상 아프리카 및 서아시아와 거리가 한참 멀었던 동아시아의 당시 인구풀이나 그로 인한 문명 시작기가 상대적으로 늦는 것은 당연한 셈이다. 게다가 문명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한 이후에도 지리적으로 방해물이 없었고, 상대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빠른 성장이 가능했던 유럽-북아프리카-서아시아-남아시아 문명권 벨트[* 현재도 이들 지역의 가장 큰 특징이 뭐냐면 다름아닌 인종이다. 예나 지금이나 여기 인구풀의 절대 주류를 차지하는 게 [[코카소이드]]이라는 점.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과 다르게 유럽 백인만이 유일한 백인이 아니다. 각 지역마다 디테일한 차이점은 있겠지만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 인도로 대표되는 남아시아 전부 유전적으로 친척관계인 범 코카소이드 그룹이다.[[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7/7a/Populations.png|#]] [[:파일:Genetic Distance of 39 Asian populations.png|#]]]와 달리 동아시아는 서쪽과 북쪽으로 [[타클라마칸 사막]]과 [[고비 사막]] 지대, 남쪽으론 [[히말라야산맥]]으로 인해 사방이 차단되어 있다시피 해서 초기 문명 단계에선 타 문명권과 교류가 힘들어 성장 속도가 늦을 수밖에 없었다.[* 지리적 교류의 중요성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아메리카의 전근대 시기 문명, 그 중에서도 기술 지체 현상으로 가장 명확하게 설명 가능하다. [[사하라 사막]]이 확장되면서 인류의 기원이나 다름없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문명권 역시 유럽, 서아시아, 북아프리카와 교류가 매우 힘들어지고 고립화되면서 지체 현상이 벌어졌으며, 아예 규모있는 대양으로 구대륙과 차단되다시피 한 오세아니아와 아메리카 대륙권 문명 역시 교류의 한계로 인해 고립되어 자체적인 특성을 가진 문명은 생겼어도 [[청동기]]와 [[철기]], [[바퀴]], 신식 건축 재료와 건축 방식 및 각종 무기류와 병법술 같은 새로운 수준의 문명으로 거듭날 요소들이 도입될 수 없었다.] 그만큼 청동기와 철기 전파도 다소 늦었다. 특히 철기는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하기 전까진 제대로 사용되지도 않았고[* 중국에서 최초로 철기가 사용된 시기를 기원전 6~7세기로 본다. 철제 농기구가 민간에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전국시대]]의 일이고 보편화된 것은 한대. 철제 무기의 경우는 다소 늦어서 전국 말기 ~ [[초한전쟁|초한쟁패기]]에 급격히 발전한다.], 서주는 야금술 면에서 자연히 동시대 다른 고대 국가들에 비해 뒤쳐졌다. 단, 철기 전파는 가장 늦었으나 인류 최초로 용광로를 통해 선철을 생산하고 철광석-주철-강철로 이어지는 방식으로 강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전국시대 ~ [[한나라|한대]]의 중국이었다. 다른 문명권이 산업혁명 이전까지 연철을 침탄시키는 방식으로 수고스럽게 강철을 만들 때[* 서유럽은 16세기 말부터 [[전로|베세머 전로]]가 개발되기 전인 19세기 중반까지 암석 또는 철로 제작한 상자에 연철과 목탄을 넣고 가열, 침탄하는 삼탄강 기술을 주로 사용했다. 18세기에 고대 인도의 기술과 동일한 도가니강이 발명되었지만 고비용 때문에 많이 사용되지는 않았다. 삼탄강 전에는 강철을 만들기 위해 불에 달군 연철에 숯가루를 뿌려가며 두들겨서 침탄시키는 방법이 유일했다. 생산량도 적어서 대부분을 무역으로 충당했다. 한편 중국은 이미 [[전국시대]]에 근세 서유럽과 동일한 삼탄강을 생산하는 단계에 있었다.[[http://m.yes24.com/goods/detail/1412288|출처: 패권의 시대(중국문명박물관 시리즈) 시공사]]] 중국은 한나라 대부터 액상 선철의 탄소농도를 조절하는 식으로 강철을 생산하고 있었다.[* 유럽에서 선철을 생산하여 철제농기구가 본격적으로 보급된 건 중세시대고 액상 선철의 탄소농도를 조절하여 강철을 생산하기 시작한 건 19세기 [[산업혁명]] 시대에 이르러서다.][* 덕분에 대량의 강철을 용이하게 얻을 수 있었던 고대 중국에선 [[한나라]] 때 이미 다리를 놓는데 강철을 사용할 정도였다. 단, 한나라 초강법은 근현대 제철과는 다른, 철강의 질이 아니라 '''양을 늘려주는데''' 의의가 있는 방법이고 철강의 질 자체는 오히려 단조 보다 떨어지기에[* 탄소를 고르게 분포하는 건 좋은데 문제는 고르더라도 탄소의 양 그 자체가 너무 많거나 너무 적거나 조절이 어려운 방법이다.] 중국에서도 질좋은 고급 무기는 초강법이 아니라 다른 문화권과 마찬가지로 단조를 써서 만들었다. 만약 근대강철 수준의 품질이었다면 척계광이 단조로(뚜드려서) 만든 일본도를 보고 감탄하며 도입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초강법의 우수함은 '양의 확보'에 있다.][[http://scholar.dkyobobook.co.kr/searchDetail.laf?barcode=4050026307942|참고 논문: 중국 중원지역 주조철기의 등장과 발전(한국고고학보 제102집 중)]] 그리고 다른 문명권에 비해 동아시아가 석조 건축이 비교적 덜 발전한 까닭은 건축에 쓸만한 석재가 매우 부족한 지대였기 때문이다.[* 강수량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장마|특정 시기]]에 강수량이 집중되는 특성상 무거운 돌을 높게 쌓으면 땅이 물러져 무너진다는 것이다.][* 현대에는 기술의 발전으로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석회석을 구할 수 있지만, 과거만 하더라도 석회석과 대리석은 중국 일부 지방의 특산품 취급받을 정도로 희귀했다. 대표적으로 한반도 같은 경우 화강암 지대인데, 화강암은 매우 단단하여 가공하기 힘들다. 그래서 화강암으로 만든 [[석굴암]]이 높게 평가받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화강암은 예술에는 쓰기 힘들어도 건축에서는 대부분의 석조 건축 문명권에서 오히려 주재료로 쓰였다. [[로마]]의 수도교와 [[인도]]의 [[힌두교]] 사원들, [[남미]]의 태양 피라미드 등이 모두 화강암제였다.] 다른 문명권들이 앞서 말했듯 지리적인 이점을 살려 서로 교류하며 문물을 나누는 동안[*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지중해]] 문명은 [[신화]]에서도 반영될 만큼 교역이 잦았고 [[인더스 문명]] 또한 메소포타미아와 교류한 것이 [[고고학]]적으로 밝혀졌다.] 동아시아는 중국 대륙 서쪽의 거대한 산맥들과 사막이라는 지형적 장애물에 막혀서 압도적으로 폐쇄적이었다. 실제로 다른 문명권과 문물 교류가 거의 없던 대표적인 지역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심지어 [[아메리카]]는 자연 조건도 꽤 좋았음에도[* 다만 남미문명이 자리한 열대우림과 안데스 고산지대는 자연적 조건이 상당히 힘들고 불리한 곳으로서 좋은 조건에도 흥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나쁜 조건에서 어떻게든 꾸역꾸역 문명을 유지시킨 것에 가깝다. 게다가 고기를 많이 제공하는 돼지나 대형 운송수단으로 쓸만한 소, 말 같은 가축도 없었다. 때문에 [[마야 문명]]은 결국 [[열대우림]]의 한계를 버티지 못하고 [[에스파냐인]]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붕괴했을 정도였다.] 16세기 당시 구대륙 문명국들과 비교하여 거의 철기 시대와 석기 시대 수준의 차이가 생기기도 했다. 그만큼 문명의 시작과 발전에서 교류가 중요한 것이다. 이런 와중에 동아시아에 구대륙의 선진문물을 전파한 주역이 있었으니 바로 인도유럽계 [[토하라인]]이었다. 토하라인들은 [[상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의 여러 도시국가와 부족들과 교류했다고 추정되는데, 그 증거로 당시 [[갑골 문자]]에 기록된 글자인 蜜(꿀 밀), 城(성 성), 里(마을 리) 따위 몇몇 [[한자]]와 당시의 [[마차]] 유물, [[소하공주]] [[미라]]의 존재 등이 그 예다. 그리하여 시간이 흘러 이 문명권은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라는, 수많은 전쟁으로 비롯된 혼란기를 거치며 급성장하였고 [[한나라]] 대에 이르면 무기와 전략, 야금술을 비롯하여 국가 행정력 면에서 다른 거대 문명들을 무서운 속도로 따라잡고 추월하게 된다. 특히 오랜 전란을 거치면서[* 전국시대에 원시적인 [[총력전]]이 등장하였다.] 국력을 효율적으로 조직화하여 전쟁에 투사하기 위한 국가 행정력 발달이 다른 문명들을 압도하였는데, 가령 [[프랜시스 후쿠야마]] 같은 석학은 [[진나라]]를 가리켜 강력한 근대국가의 원형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한대에는 고대 세계에서는 상상도 못할 전 인구를 상대로한 인구조사를 정기적으로 실시할 정도였다. 그 기록들은 아직도 남아있는데 당시 한나라 조정이 파악한 6,000여만의 인구는 후세의 추정과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당대에는 [[지옥]]과 같았던 전란이 역설적이게도 이 문명권의 폭발적인 발전을 불러온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이후 [[근대]] [[서유럽]] 또한 역설적이게도 지들끼리 부딪치며 미친듯이 패권경쟁을 벌여 [[산업혁명|눈부시도록]] [[과학혁명|발전한 끝에]] 다른 문명권들을 [[벨 에포크|모조리 압도했다.]]] 또한 단순한 기술 발전뿐만 아니라 사상 발전도 [[기하급수]]적으로 진행되었다. 당장 [[춘추전국시대]]에 쏟아져 나온 [[공자]], [[노자]], [[맹자]], [[묵자]], [[장자]], [[손자]], [[한비자]] 등 쟁쟁한 철학자들이 [[천하]]의 긴 혼돈을 어떻게든 잠재우고자 [[유가(제자백가)|유가]], [[도가]], [[법가]], [[묵가]] 등 여러 종류의 사상적 방법론을 들고 나왔으며, 이들의 사상은 아주 오래도록 동아시아 지역의 [[정치]], [[외교]], [[종교]], [[풍습|사회적 관습]]과 [[예절]]로 자리잡으며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지금도 사회 관습 면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기도 하다. [[진(통일왕조)|진나라]]가 멸망하고 [[한나라]] 시기 초반의 혼란기를 극복하자 중국 지역은 [[잠재력]]을 터뜨리기 시작하며 당대에 [[로마 제국]]과 함께 여러 면에서 동시대 다른 문명들과 비교해 앞서나가기 시작하고[* 물론 [[중동]]과 [[인도]]에도 이에 견줄만 한 문명이 존재했다. 로마와 한나라에 비해 인구 면에서 밀렸을 뿐이다. 한나라 건국과 비슷한 시기 멸망한 [[마우리아 제국]]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나라였다.] [[관료제]]와 상공업 발달, 여러가지 기술 발전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전한]]은 정주민족이 세운 국가이면서 수십 만이 넘는 [[기병]]을 양성해 아무것도 없는 [[초원]]지대에 십 만 단위로 투입해가며[* 미칠듯한 소모전을 버텨냈다는 의미이다.] [[유목 제국]]과 총력전을 뜨는 가공할만한 국력을 가진 나라였다. 또한 한나라 때 현대 [[종이]]의 원류가 발명되어 현재까지도 쓰이고 있다. 특히 [[한나라]] 때 등장한 '''초강법(炒鋼法)'''[* 초강법은 근대의 [[전로|베세머 전로법]]과 유사하게 선철(통상 4wt% 이상의 탄소를 함유)을 녹인 용선에 공기를 불어넣고 금속산화물 등 탈탄제를 넣어 탄소량을 줄이는 방식으로 강철을 생산한다. 한대의[[회남자|《회남자》]], 명대의 《천공개물》에 초강법의 탈탄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고고학적으로도 매우 일찍 등장하는데 관련 논문에 따르면 한국 기준 [[https://academic.naver.com/article.naver?doc_id=174924380|한성 백제 시절 중국에서 도입된 게 확인된다]]. 초강법과 동일한 원리로 강철을 생산하는 서양의 베세머 전로법은 1856년에 등장했고 현대 제강기술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다만 초강법과 관련해 [[인터넷]]에 퍼진 오해를 바로잡자면, 초강법은 현대 제철공법과 다른, 철강의 질이 아니라 '''양을 늘려주는데''' 의의가 있는 방법이고 철강의 질 자체는 오히려 단조보다 떨어지기에(탄소를 고르게 분포하는건 좋은데 문제는 고르더라도 탄소의 양 그 자체가 너무 많거나 너무 적거나 조절이 어려운 방법이다) 중국에서도 질 좋은 고급무기는 초강법이 아니라 다른 문화권과 마찬가지로 단조를 써서 만들었다. 만약 근대강철 수준의 품질이었다면 척계광이 단조로(뚜드려서) 만든 일본도 보고 감탄하며 도입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초강법의 우수함은 '양의 확보'에 있다.]과 [[위진남북조시대|위진남북조]] 때 등장한 관강법(灌鋼法)[* 주철과 연철을 섞어 강철을 만드는 방법.] 상용화에 힘입어 중국은 고대부터 강철의 대량생산이 가능했다. 한나라가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무렵 [[한국]]과 [[베트남]]에서도 부족 국가에서 고대 국가로서 본격적으로 체계를 잡아가고 있었으며, 일본에서도 열도의 서남부권에서 현대 일본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야마토]]계의 맹아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후 한나라가 붕괴하고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를 거쳐 [[서진]]으로 다시 통일되었으나, 서진이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으로 다시 멸망하고 이를 틈타 [[오호#s-2|북방 유목민들]]이 화북으로 민족 대이동을 하여 [[오호십육국시대| 5호 16국이라는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혼란기]]가 도래한다. 그리고 이러한 [[위진남북조시대|중국의 대분열기]]를 틈타 [[고구려]]가 팽창하여 [[만주]]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오랜 혼란기가 끝난 뒤에는 [[수나라]]와 [[당나라]]가 생겨나 기술과 경제를 더욱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수나라]]는 [[대운하]]를 건설함으로써 중국 대륙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중국]]이라는 개념을 더욱 강하게 했다. 간단하게 말해서, 문화적 교류와 동질감을 더욱 이끌어냈다는 것.[* 하지만 당대에 대운하라는 것은 대단한 무리수라서 [[문제(수)|수문제]]도 하려다 중단한 정책이다. [[양제(수)|수양제]]가 대운하를 지을 당시 [[양제(수)|수양제]]의 실책과 이후에도 벌어진 온갖 막장 행각 탓에 [[수나라]]가 망하고 이후 [[현종(당)|당현종]] 때 와서야 [[문제(수)|수문제]] 시절의 인구를 회복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수나라는 [[고구려-수 전쟁|고구려 원정]]에서 113만이라는 유례없는 대군을 동원하였음에도 [[살수대첩|참패하였고]] 거기에 대운하 같은 토목공사의 부담이 겹쳐 수백년만에 통일을 이룩한 보람도 없이 2대만에 멸망하며 진나라의 전철을 밟고 만다. 뒤를 이은 [[당나라]]는 이보다 훨씬 진일보하여 중국은 물론이요 동아시아의 다른 지역에도 선진 문물을 전파하거나 패권을 휘둘러 천하의 정세를 바꾸는 등, 동아시아에 일대혁명을 일으켰다.[* 심지어 [[신라]], [[발해]], [[고려]]는 건국 시 [[당나라]]의 법 체계와 조직 체계를 많이 참고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일본]]의 견당사[* [[일본]]이라는 나라 이름과 [[천황]]이라는 황제의 칭호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을 때 나온 것이다. 이전에는 대왕(大王)이라는 뜻의 '오오키미'를 사용했다.], [[투르크]], [[티베트]]의 성장, 또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서로 견제하며 몇백 년 동안이나 눈치싸움을 하고 있던 [[한반도]] 내부의 상황을 한 번에 뒤집어 [[신라]] [[삼한일통|치하의 통일]]을 이루는데 매우 지대한 공을 했다. 그러나 당나라는 나중에 신라까지 집어삼키려다 [[기벌포 전투]]에서 패배하여 [[만주]]와 [[한반도]] 북부로 만족해야 했고, 이마저도 [[발해]]의 등장으로 금방 저지됐다. 이처럼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운 한사군이 무려 400년을 간 것에 비해 안동도호부는 30년만에 축출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만주-한반도 세력의 역량이 이제는 통일 중국조차 쉽게 지배하지 못할 정도로 성장했다는 것을 뜻한다.[* 반면 베트남은 당나라의 지배가 성공적으로 정착해 280년간 지속되었다.] 한편 [[일본]]은 [[한반도]]를 거쳐 문명을 간접적으로 전수받는 것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중국과 직접 교역하기 시작했으며, [[일본 열도]] 개척 또한 상당히 진척되어 야마토의 세력이 오늘날 도쿄 수도권이 된 [[가마쿠라]] 지역까지 미치기 시작했다. [[티베트]] 역시 본격적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해 전성기에는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정복하는 등, 토번 제국으로서 그 위세를 떨쳤다. 무엇보다 이 시대에 맹위를 떨친 유목민은 단연코 [[돌궐]]로서, [[당태종]] 시대에는 그에게 패배하여 천가한의 칭호를 바치는등 복속했으나 [[측천무후]] 시대에는 막대한 조공을 뜯어내며 당나라를 굴복시켰다. 세월이 흘러 당나라가 절도사의 난과 농민반란으로 멸망한 뒤 다시 분열기인 [[오대십국시대]]가 열렸으나, 이미 한-수-당을 거치며 중화, 천자국, 한족이라는 정체성이 중화권 사람들 사이에서 단단하게 형성된 뒤였기 때문에 400여년간 분열했던 과거와 달리 이번에는 100년도 안 되어서 다시 통일되었다. 통일 제국인 [[송나라]]는 군사면에서 약체였을지는 몰라도 경제, 문화, 기술 면에서 당대 최고 수준의 문명을 보유한 국가였다.[* [[송나라]] 때에 나온 [[주자학]]은 후대의 동아시아 문화에 대단한 족적을 남겼다. 기술적인 면에서도 [[증기기관]]과 흡사한 기계장치를 거의 만들 뻔 했을 정도로, 이전 시대에 비해서 윤택해지고 상당히 진일보한 시대였다.] 동아시아에서 [[화학]]이 문물로서 획기적인 진보를 이루기 시작한 것도 송대의 중국에서였고, 이전까진 북중국에 비해 정치적 영향력이 미비했던 남중국 지방이 급속히 성장하면서 동시에 [[송나라]] 전체의 경제력에 크게 기여했다. 중국 대륙의 인구가 1억명을 돌파한 시기도 바로 이 때였다. 당-송 시대에는 중국에서 최초의 화약무기가 발명되었고, 이를 훗날 [[몽골 제국]]이 전 세계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이후 전쟁의 판도와 [[구대륙]]의 역사를 바꾸게 된다. 같은 시기 중국 북부에서는 여러 북방 민족들이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선비족]]과 [[오환족]]이 고대 동아시아 북부에서 활동했었다면, 선비와 오환에서 갈라진 [[거란족]]은 중세 중국시기에 활동했었고 마침내 [[야율아보기]]가 거란족을 통합, 송나라군을 격파하고 [[연운 16주]]를 빼앗은 뒤 막대한 조공을 갈취하며 [[요나라]]를 세웠다. 훗날 [[청해#s-2|칭하이 호]]에서 더 북쪽으로 이동한 [[탕구트]] 역시 훗날 [[서하]]를 세웠고 역시나 송나라군을 격파했다. 이들은 국가를 세우기 전부터 당나라 시기의 수준 높은 문화와 기술을 받아들였고 국가 건설이후 송나라와 싸우면서 동시에 송의 문화를 받아들여 자신들만의 문화를 발전시키며 국력을 키워나갔다. 송나라에 대해 군사적 우위를 차지한 요나라는 내친김에 동아시아 패권을 확실히 못박기 위해 고려를 침공하였으나 [[고려]]의 명장 [[강감찬]]에게 대패하고 고려는 100년간 [[고려청자]] 등의 귀족 문화를 꽃피우며 전성기에 돌입한다. 일본에선 천황가의 두 분가인 타이라 가문과 미나모토 가문의 싸움끝에 미나모토 가문이 승리하여 최초의 막부인 [[가마쿠라 막부]]를 열었다. 이후 [[거란족]]의 [[요나라]]가 [[여진족]]을 통합시킨 [[완안아골타]]의 공격으로 멸망한 뒤 [[퉁구스]]계 [[여진족]]의 [[금나라]]가 건국되었고, 다시 송나라를 침공해 오호십육국시대 이후 수백년만에 [[정강의 변|한족을 남중국으로 몰아내고 북중국을 차지한다.]] 이 때 금나라 역시 요나라 문화와 송나라 문화를 받아들였다. 또한 송나라 역시 유목 민족의 문화가 많이 들어와, 한 송나라 사신이 금나라에 다녀온 후 '회수 이북의 백성들은 복장과 풍습이 오랑캐에게 물들었다' 라며 한탄하기도 했다. 군사적으로는 요나라의 굴기와 그 뒤를 이은 금나라 등으로 어지러웠으나 문화, 경제적으로는 엄청난 발전이 있어서 송나라는 손권의 오나라 이후 꾸준히 추진되었던 장강 유역 개발을 마침내 달성했으며, 고려 역시 벽란도 등을 통해 활발한 국제무역을 했고, 일본 역시 상업이 크게 발전해 송나라와 교역하는데 쓰인 동전이 1억문에 육박할 정도였다. [[13세기]]에 접어들어, [[칭기즈 칸]]이 [[몽골 제국]]을 건국하고 [[파죽지세]]로 [[세계정복]]을 시작함에 따라 동아시아 기반 유목 제국에 의한 [[유라시아 대륙]]의 광대한 영토 지배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 때는 군사적, 외교적으로 당대 유럽권과 중동권을 비롯한 여타 구대륙 문명권들을 완전히 압도했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몽골의 한족 지배는 다른 유목민계 정복 왕조와 비교해도 유별나게 가혹하여 한족을 최하등급인 4등급으로 분류하였고, 심지어 몽골 귀족[* 다만 [[초야권]] 항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과거에 선동된 것도 있고 황금씨족 같은 몽골 귀족들도 다른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혈통을 진짜로 숭배하고 대부분 자신들의 피가 밑바닥에도 있는 난잡한 개족보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몽골의 비귀족들이면 몰라도 귀족들은 가능성이 낮다.]이 한족 여성의 초야권을 가지는 등 극심한 탄압과 차별을 가했다. 한편으로 고려는 나라를 존속시키는데 성공하여 아예 멸망해 4등급이 된 한족보다는 사정이 나았으나 역시나 파견총독인 다루가치의 횡포와 조공 물품 마련, 공녀 차출, 일본 원정군 차출로 상당히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일본 역시 태풍의 도움으로 간신히 물리치긴 했으나 역사상 처음으로 대륙에게 대규모 공격을 당해 충격을 받았다. 또한 운남성을 기반으로 중국과 다른 정체성을 형성하며 수백년을 존속하던 [[바이족]]의 나라 [[대리국]]도 몽골의 침략으로 초토화되었으며, 이후 다시는 독립국가를 세우지 못하게 된다. 반면 베트남은 불세출의 명장 [[쩐흥다오]]가 나타나 몽골군을 격파하여 베트남을 지켜냈다. 이후 결국 폭정과 침략을 반복하던 원나라는 100년도 다 채우지 못하고 [[주원장]]이 이끄는 [[홍건적|한족 반란군]]에 의해 멸망하여 다시 몽골 고원으로 축출되었으며, 중국에는 다시 한족 왕조인 [[명나라]]가 건국되었다. 명나라는 초기에 함대를 [[동아프리카]] 지역까지 [[정화의 대원정|보내면서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펼치기도 하였으나]], 세력을 과시하는 것 말고는 딱히 경제든 영토든 기술이든 이에 따른 실익이 없었다. 초창기에는 북방에 [[몽골족]]의 [[북원]]이 건재하였으나 영락제는 유목 세력 가운데 몽골에게 집중 공세를 시작하였고 마침내 몽골 세력은 분쇄되어 그들 대신 [[오이라트]][* 후에 몽골을 정복한 후 토목보의 변으로 명나라 황제를 사로잡기도 했다. 그러나 기세를 타고 이어진 대결에서 타격을 입어 오이라트 세력 또한 약화하여 다시 몽골이 몽골 지역의 패권을 회복하게 된다.]와 [[만주족]]이 떠오르게 된다. [[한반도]]에서는 [[태조(조선)|이성계]]의 요동원정군이 [[역성혁명]]을 일으켜 [[조선]]을 건국하고 그 뒤 [[세종(조선)|세종]]대에 이르러 동아시아 유일의 표음문자인 [[한글]]을 창제하고 [[여진족]]을 몰아내 국경을 두만강으로 확립하는 등 전성기를 맞이한다. 일본은 천황을 꼭두각시로 부리던 쇼군이 본인도 막부재상인 싯켄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끝에 결국 아시카가 막부가 무너지고 [[센고쿠 시대]]를 겪게 된다. 또한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에 걸쳐 왜구들이 조선과 명나라의 거의 모든 해안지대를 약탈하였으며, 이것이 명나라가 해금령을 내린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센고쿠 시대가 종식된 이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 명나라 역시 참전하여 7년 간의 [[임진왜란]]이 벌어졌다. 조선은 국토가 초토화 되었고 명나라 역시 상당한 재정을 소모하고 내부 상황이 혼란한 틈을 타서, 과거 여진족 금나라의 후예를 자처하던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하고 결국 이 후금이 [[청나라]]가 되어 중국 전토를 차지하게 된다. 그런 와중에 [[대항해시대]]로 [[아메리카]]에서 유입되는 엄청난 부와 함께 [[르네상스]]로 문화 발전까지 이룩하며 폭발적인 성장을 맞은 유럽 문명과 질적인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이 점에 대해 다른 요소를 제쳐두고 지리적인 부분만 봤을 때 어쩔 수 없었다는 평이 있다. 보통 상업 교류는 바다와 강을 통한 수운 교역이 활발할 수밖에 없는데, 중국은 만리장성 이남으로 광활한 육지가 이어져 있어 상대적으로 [[지중해]]를 [[호수]]처럼 품고 [[발트해]]와 [[북해]]를 통해 교역하는 유럽 문명의 상업보다 불리한 교역 조건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대서양을 건너 [[북아메리카]] 동쪽은 서쪽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착하기 쉬운 조건이며, 밑으로 위치한 아프리카는 풍부한 인력을 끌어당길 수 있는 위치에 있어 다른 지역보다 매우 유리했다. 한 가지 더 주목할만한 점은 [[중화제국|중국은 통합된 제국]]으로서 주변의 위협이 없이 고인물이 썩듯이 외부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고, 이는 명나라와 청나라가 후기로 갈수록 쇠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된다. 그에 반해 유럽은 고만고만한 체급의 국가들이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구조였고, 이는 필연적으로 경쟁을 통한 발전을 낳아 동시기 중국을 아득히 넘어선 기술을 가질 수 있는 문명이 될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 [[중동]] 역시 [[오스만 제국]]으로 통합되어 있었다. 다만 [[인도]]는 유럽과 별 다를 것 없이 분열되어 있었다.] 특히나 상징적인 부분은 화기 기술로써, 기존에 명나라와 조선이 쭉 발전시켜 오던 화약병기를 유럽에서 온 조총, 불랑기, 홍이포가 대체하게 되었고 이후로도 화약무기 발전은 쭉 유럽이 주도하게 된다. 이처럼 만주족의 [[청나라]] 시기에 [[유럽]] 지역(특히 [[서유럽]])은 급속한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고, 더군다나 [[청나라]]는 [[명나라]] 시절 과학 기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유럽]]은 [[산업혁명]]과 [[과학혁명]]을 일으켜 근대 경제로 나아가기 시작하였으며, 완전히는 아니었지만 [[맬서스 트랩]]을 일부 깨부수면서 경제 발전=인구의 증가라는 공식을 파괴하고 경제 발전으로 개인의 부를 증가시켰다. 그러다 [[아편전쟁]]이 일어나고 말았으니, 이에 따라 중화대륙을 중심으로 조공-책봉 체제가 유지되던 동아시아의 기본적인 질서가 깨지기 시작했다. 청나라의 내분과 혼란도 극심했기에 국제적, 정치적 혼란 속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다. 결국 [[청나라]]는 서구 [[열강]]들에게 불평등 조약을 강요당하고 몇몇 땅을 떼어주는 수모를 겪게 된다. 심지어 신흥 열강이 된 일본이 청나라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유입되는 서양 문물을 보고 변화할 필요성을 깨달았고 새로운 사상이 유입되며 근대화가 진행되었다. 이 때 국제질서가 기존의 중국 중심 책봉 체제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이 과도기로써 기존 조공 질서에 참여한 국가만 다시 연합해 서구 열강에 대응하자는 [[아시아주의|동아시아]] [[동양평화론|협력론]]이 대두되기도 했다.(백동현(2001),'대한제국기 언론에 나타난 동양주의 논리와 그 극복',한국사상사학,17,pp513-552)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로 [[근대화]]에 성공하여 [[열강]]의 반열에 들어섰고, [[일본 제국]]의 이름을 걸고 [[제국주의]] 행보에 합류하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한 이후 [[일본 제국]]은 이전에 사용하던 국호인 '일본국'으로 돌아가서 현대까지 사용되고 있다. 사실 동아시아 전통 국호 작명법이 원래 저런 식이다.] [[청나라]]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배하여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완전히 잃었고, 몇몇 영토와 이권을 일본 제국에게 넘겨주었으며 [[대한민국|한국]]과 [[타이완]]은 아예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그리고 [[제정 러시아]]의 남하 또한 계속되어 내외 [[몽골]], [[만주]] 북부, [[위구르]]는 러시아의 영향권에 놓였다. [[청나라]]는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매우 흔들렸으며, 거기에 이런 혼란기를 틈타 역대 중국 역사가 그러했듯 대대적으로 출현한 [[군벌]]들에 의한 [[춘추전국시대]]를 다시 찍으면서 중국 대륙은 아수라장이 되어 외부에 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당시까지도 [[군벌]]들이 남아있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이렇게 아시아의 최강국이었던 [[중국]]이 19세기 ~ 20세기 중반 동안 그 명성이 꺾이고 아시아 최강국의 자리는 [[일본]]에게 넘어가게 된다. 그 후, [[제정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일본 제국|일본]]에게 패배하며 일본은 이 지역의 맹주로 떠오른다. 러시아의 패배는 [[제정 러시아]]에서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고, [[제정 러시아]]는 [[사회주의]] 국가 [[소련]]으로 거듭났는데 이 소련도 나중에 해체되어 결국 현재의 [[러시아 연방]]이 된 것이다. [[한국]]은 [[조선]] 말기인 1864년부터 세도정치를 무너트리고 집권한 [[고종]]의 실세인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서구와 문을 닫고 있었다가 1875년, [[운요호 사건]]을 기점으로 [[강화도 조약|일본과 불평등 조약까지 맺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나라의 문을 열고 근대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조선]]은 여전히 청나라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으며,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청나라 군대가 주둔하면서 조선은 점점 청의 속국이 되어가는 듯 싶다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계기로 일어난 [[청일전쟁]]으로 조선은 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이미 제국주의의 본색을 띄기 시작한 일본이 되려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노리기 시작하였다. 청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조선은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로 얼룩진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1896년]], [[을미사변|명성황후가 일본 공사관에 의해 피살당하고]] [[아관파천|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는데]], 이 사건으로 이후로 고종은 일본의 위협을 막기 위해 정치적으로 러시아를 끌어들였으며, [[1897]]년 [[대한제국]]의 선포와 함께 한국이 완전한 근대 국가임을 알리고 급진적인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도 일본과 같이 조선을 노리고 있었으며, 한국은 최후의 발악으로 양국의 위협 속에서 중립을 지키려 하다가 결국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 됨과 동시에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고, 나중에는 기어이 [[경술국치|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만다.]] 한편 [[민주주의]], [[사회주의]] 등 새로운 사상이 유입되면서 이 지역 국가들은 정치적 격변기를 겪는다. 그래서 [[20세기]]는 동아시아 역사상 최대의 [[헬게이트]]라 할 만했다. [[청나라]]는 [[쑨원]], [[장제스]]에 의해 멸망했고 [[중화민국]]으로 바뀌며 [[군벌]] 난립과 이념 다툼 등으로 불안정하고 미흡하지만 일부 근대화를 어느 정도 이룩했다. [[일본]]도 이때 [[다이쇼 데모크러시]]라고 해서 잠깐이나마 민주주의가 발전하긴 했으나 [[대공황]]이 일어나면서 망한다. [[한국]]은 [[식민지|이미...]] [[경제 대공황]]이 일어나면서 일본에서 [[군국주의]]가 대두하고, 마침내 [[일본 제국]]이 이번에는 영원한 숙원이던 [[중국]] 본토 제패를 이루기 위해 [[중일전쟁]]을 일으킨다. 그러나 중국과 벌이는 전면전은 아편전쟁 당시 영국도 피했을 만큼, 중국의 체급은 압도적이었다. 일본군은 점과 선의 점령만 반복하며 지속적인 소모전이 이어졌고, 시간이 지날수록 중국 측도 대비를 잘 하게 되어 선전하게 되면서 일본은 중국에 많은 병력이 묶인 채로 엄청난 손해를 입었으며, 특히 일본의 전쟁 수행능력이 한계에 다다르기 시작했다. 결국 [[태평양 전쟁]]으로 [[양면전쟁]]에 내몰린 일본 제국은 초기에는 선전하는 듯하였으나, 그 자신만만함이 당시 힘을 기른 채 웅크리고 있던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는 바람에,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제압당하여 패망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된 뒤, 기존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쇠락하거나 힘을 잃고 [[일본]]은 패전하며 식민지배 구조는 해체되었다. 그리하여 일본 패전에 큰 공이 있었던 [[중화민국]]이 [[상임이사국]]이 되어 국제적으로 중요한 발언권과 지위를 차지하며 굴욕의 19~20세기 초반 시절을 벗는 듯 했지만, [[항일]]하는 척하며 세력을 기르던[* "일본이 중국을 공격해서 공산당이 살아날 수 있었다. 그래서 너무 '''고맙다.'''" - 마오쩌둥이 '''실제로 한 말'''이다.]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의 역습을 당해 [[국공내전]]에서 패배하고 [[국부천대]]를 [[대만|단행하여]]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공산화되었다.]] 결국 동아시아 지역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전 세계를 지배한 [[냉전]] 체제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지역이 되었다. [[중국]]과 [[소비에트 연방]], [[북한]]이라는 공산권 국가들이 이 지역의 패권자로 등장하고, [[한국]]과 [[일본]], [[대만]]을 통해 동아시아의 공산화를 막는 동시에 이 지역에 확립한 자신들의 영향력을 지키고자 했던 신생 초강대국인 [[미국]]이 대립하는 지역이 된 것이다. 이러한 대립은 1950년, [[6.25 전쟁|한국 전쟁]]으로 불을 뿜어 [[제국주의]] 시대에 이어 또 다시 대규모로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 전쟁은 각국이 큰 인명 피해를 낸 끝에 휴전되었지만 이로 인해 20세기 초중반 당시의 동아시아는 [[동유럽]]권, [[아프리카]]와 함께 전 세계적으로 매우 위험하고 불우한 지역이 되었다. 그러던 도중, 1960년대 이후 전 세계적인 전후 고도성장기가 찾아오게 되고 서구권을 제외한 다른 다수의 개발도상권 지역들이 [[중진국 함정]]에 빠지며 성장에 실패한 것과 다르게[* 사실 이때도 개발도상국들의 GDP 자체는 계속 성장을 거듭했다.] 동아시아 다수 지역은 이 시기에 다시금 경제적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한국과 일본이 이 때부터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으나, 중국은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나라의 모든 것이 작살나고 [[중소분쟁]]까지 겪은 탓에 고립적인 외교를 1970년대까지 펼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전 세계 최고의 경제적 호황기인 [[1980년대]]가 찾아온다. 사실 이 때는 다른 지역도 크게 발전하고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개발도상국들이 빠르게 발전하던 때였는데, 이는 동아시아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이 [[3저 호황]]과 [[1988 서울 올림픽|올림픽 특수]]로 [[한강의 기적|가파르게 발전하고]], 일본 역시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경제가 어마무시하게 발전해 미국과 대립각을 세울 정도였다.]] 중국 또한 [[흑묘백묘론|개혁개방정책]]을 펼쳐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소련 붕괴]] 이후로는 한국, 중국, 일본이 계속 발전하고 몽골도 개혁개방으로 경제성장을 하여 동아시아의 황금기를 이끌었으나, 일본은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버블이 꺼지는 동안]]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이 경제력을 크게 상승시켰다. 그러나 [[1997년 외환 위기|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가 일어나는데, 일본, 중국도 어느 정도의 경기 침체를 겪었고 한국은 아예 이를 정통으로 맞으며 [[외환위기]]를 겪어 다른 동남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경제력이 정체되어 아직까지도 그 영향이 많이 남을 정도가 되었다.[* 아시아 금융 위기가 얼마나 타격이 컸는지, 1997년부터 1999년까지 전 세계 GDP가 감소할 정도였다.] 이때부터 특히 중국이 엄청 빠르게 발전하게 되는데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동아시아 국가들의 외교 관계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러나 전 세계 경제가 [[2000년대]] 초반 [[닷컴 버블]]과 [[9.11 테러]]로 인해 잠깐 위기를 맞다가, 2000년대 후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황금기가 아예 끝나면서 동아시아 경제의 황금기도 작살나고 설상가상으로 이때부터 한국, 일본 간에 외교적 결례가 자주 일어나 [[한일관계]]가 경직되었으며, 2010년 일본을 꺾고 아시아 1위, 세계 2위의 경제력을 보유한 중국이 [[센카쿠 열도]] 분쟁, [[동북공정]]을 필두로 패권 경쟁 시작을 암시하더니 2013년, 시진핑이 집권하며 이는 현실이 되어 동아시아는 한국, 일본, 대만의 친서방 세력과 북한, 중국, 러시아의 반서방 세력의 첨예한 대립의 장이 되었다. 근데 그 와중에도 [[한일관계]]는 계속 나빠지고 러북중 간 관계는 강화되고 친서방 국가에 친중 세력이 늘어나자[* 실제로 2010년대 중반부터 친 공산권, 반미 성향 제3세계 국가는 물론이고 친서방, 친미 성향 제3세계 국가에서도 친중 세력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고 마침 한국도 [[박근혜 정부]] 때부터 친중 세력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만큼 경제분야에서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는 뜻이다.] 2016~17년 [[사드 보복]], 2018년 [[틱톡]] 및 중국산 양산형 게임 및 앱에서 광고 및 개인 정보 수집, 기타 다른 문제가 터지고 2019년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홍콩 민주화 운동]],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 및 [[중국의 한국 문화 예속화 시도]]로 인해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친미 국가는 물론이요 친중 국가에서도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매우 크게 나빠지기 시작해 중국이 불리하다는 의견이 주를 이뤘으나 중국의 경제력이 점차 커지면서 전 세계 경제가 중국에 의존하기 시작해 중국이 유리하다는 의견도 다수 나온 상태. 아무튼 한, 일, 대만은 친서방 세력으로써 북, 중, 러의 반서방 세력의 패권주의에 대응하고 있고 이에 따라 동아시아 일대는 [[미국-중국 패권 경쟁]]의 가장 중요한 무대가 되면서 [[세계의 화약고]]로 취급받는다. 외교적으로도 [[소련 해체]]의 시초였던 [[데탕트]] 이후에는 서로 문호를 열었고, 이에 따라 지금은 그럭저럭 상호 간 경제적, 사회적으로 협력과 교류를 하는 관계가 되었다. 그러나 폭탄이나 다름없는 [[북한]]의 존재와 [[대만]]과 [[중국]]의 [[양안관계|갈등]], 곳곳에 산재한 영토 분쟁, 동아시아 각국의 [[민족주의]] 및 [[국가주의]]적 전통 등으로 인해 이 지역은 잠재적이지만 여전히 아주 위험한 [[세계의 화약고]] 중 하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