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성애 (문단 편집) === 한국사 === [[신라]]시대의 [[화랑]]이 동성애를 했다고 추측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대부분 위작으로 의심받는 필사본 《[[화랑세기]]》에 근거를 두고 있어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정확한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려]]시대 때는 국왕이 동성 연애를 했다는 기록이 조금씩 전해지고 있다. 예컨데 [[목종(고려)|목종]]의 경우에는 어머니 [[천추태후]]의 등쌀에 국정에 흥미를 잃고 동성애에 몰두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려사절요》에서는 그 덕분에 목종에게는 자식이 없다는 얘기도 적혀있다. [[충선왕]]은 측근이었던 원충을 남색으로 총애하였다. [[이규보]]의 작품 《차운공공상인 증박소년오십운》은 유가대사 경조라고 하는 고승과 박소년의 사랑 이야기인데 동성애를 일컫는 옛단어인 대식(對食)이 직접적으로 언급된다. [[공민왕]]은《[[고려사]]》 등에 자신의 뜻대로 정국이 돌아가지 않자 향락에 빠져 자제위 등을 설치해 미소년들에게 자신의 시중을 들게 했다, 자제위 소속의 소년이 관계를 맺기도 했다는 식의 기록이 있으나, 고려사 자체가 조선조의 [[프로파간다]] 성향이 있어 확정하기는 어렵다. [[조선]]시대가 되어 [[유교]]가 사회 질서로 정립됨과 함께 동성애는 본격적으로 음지로 숨어든다. 조선 시대의 가장 큰 동성애 스캔들은 [[세종대왕]]의 장남 [[문종(조선)|문종]]의 2번째 세자빈이었던 [[순빈 봉씨]] 사건이었다. 순빈 봉씨는 남편과의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고, 그래서 [[궁녀]]들과 동성애 행위를 계속해서 남발하다 들켜서 폐출당하고 결국 [[자살]]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통신사]]가 일본의 동성애 풍습을 괴이하게 여겼다는 기록도 있다. 다만 조선 후기로 접어 들면서 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민간의 동성애는 어느정도 있었던듯 한데 미소년을 두고 동네 남정네들이 겨루기를 한다는 기록등이 [[조선해어화사]]등에서 언급된다. 조선 후기 문인 육용정의 《이성선전(李聖先傳)》에는 주인공 이성선이 이웃집 소년을 사모하는 이야기가 나온다.[[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41218/68606425/1|#]]《[[백범일지]]》에도 치하포 사건으로 복역 중이던 시절, 남색 커플을 이용하여 탈옥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외에도 남사당패에서 남색을 즐겨했다는 기록물들이 종종 나온다. [[절(불교)|절]]에서는 후정(後庭)놀음이라는 이름으로 간간이 행해졌다는 조선 기록이 남아있다. 단 이를 두고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허용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런 기록이 남아있다는 것 자체가 [[불교]]를 깎아내리기 위해서 남아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 사실 [[유교]] 사상 자체를 보면 동성애를 차별했다거나 금지하지는 않는다. 그냥 노코멘트다.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단지 사회 분위기가 쉬쉬하는 것이었을 뿐이었다. 근대의 경우 권장은 아니더라도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개화 이후 나타난 [[신여성]]들의 경우, 아직 구식인 가정이나 신지식인인 척하면서 신여성을 노리는 유부남들을 피해 자신들끼리 애틋한 감정을 느끼고 동성애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구식과 신식의 과도기였던 시절, 결혼은 부모와 집안에서 정해 준 사람과 해야 했다. 이렇게 억지 결혼을 한 남성들이 고향을 떠나 신식 학교에서 신식 교육을 받으면[* 신식 교육을 받고 신식 생활을 하는 남녀들을 모던 보이, 모던 걸이라 불렀다.], 고향집에 구식 아내를 남겨두고는 본인이 좋아하는 신여성과 교제하기 일쑤였다.[* [[박정희]], [[김호남]](구식 아내), [[이현란]](신여성)이 대표적 사례.] 남성의 이러한 행동은 용인되었으나, 여성은 그렇지 못했다. 또한 아직 보수적인 풍토가 짙어, 남녀가 자유로이 연애하는 것을 매우 나쁘게 생각하던 시절이었고, 특히 이는 여성에게 더욱 엄격했다.[* 먼 옛날 이야기가 아니고,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이랬다.] 그래서 신식 여학생들이나 신여성들은, 남성과의 교제 대신 여성끼리의 교제를 많이 택하게 된 것이다. 이를 비관해 동반 자살한 사례까지 있다.[* 이는 전 세계 공통으로 여권에 대한 인식이 재고되고 여성들의 학식 수준이 높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현상 중의 하나다. 일본 역시도 [[메이지 유신]] 이후 여류 문학가들 사이에서 이런 경향이 짙었다.] 홍옥임[* [[홍난파]]의 형 홍석후의 딸. 홍석후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출신의 [[의사]]로, 한국 최초의 근대 의사 중 하나다.]과 김용주라는 두 여성의 사건인데, 이는 훗날 [[콩칠팔 새삼륙]]이라는 뮤지컬로도 만들어졌다. 이 일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자, 비슷한 사건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남성 역시 학교 [[기숙사]]의 발달로 사건이 일어나는 일이 많았다. 당시 근대 사회에서는 동성애가 [[결혼]]과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나쁘게 보지 않는 편이었다. 그저 [[사춘기]] 때의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보는 편견이 팽배했으며, 이 편견은 역설적으로 동성애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가 되었다. 다만 동성애 문제가 연애를 넘어 결혼까지 가는 경우 이야기는 달라졌다. 청소년 시절의 연애에서는 자유로웠을지 몰라도 그 이상에 대해서는 많은 제약을 받았다. 하지만 여자가 여자와 결혼식을 올린 [[용자]]급 사례도 있었고, 이것은 당시 신문에서도 기사가 실렸다고 한다. 후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한 춘원 [[이광수(소설가)|이광수]]의 작품 중, 남자 대학생이 남자 동급생에게 묘한 감정을 품는다는 〈윤광호〉라는 작품도 있다. [[파일:attachment/1930s-homosexuality.jpg]] >고요한 [ruby(女學校, ruby=여학교)]뒷모퉁에는 참말 나혼자보기에는 아까운 [ruby(情景, ruby=정경)]이 있다。 새빨간뺨。나려감은눈。 가느다란몸집。 >둘이는 정답게 어깨를 겨렀다。 >말할듯이 말할듯이 말은 못하고 손짓발짓 [ruby(愛嬌, ruby=애교)]만피우는 어린[ruby(斷髮女學生, ruby=단발여학생)] 점잔을 빼면서도 그를어루만지는 [ruby(上級生, ruby=상급생)]、이들이 아마도 말많은 동무들의 [ruby(問題人物, ruby=문제인물)]인듯십다。 ▲ 1930년대 신문 삽화에 [[레즈비언]]의 연애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1948년 이래로 동성애는 범죄가 아니며, 처벌 또한 받지 않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