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북역치 (문단 편집) === 장쭤린의 죽음과 장쉐량의 집권 === [[국민당의 2차 북벌]]과 [[황고둔 사건]] 문서 참조. 펑위샹, 옌시산과 연합한 [[장제스]]의 2차 북벌에 베이징을 중심으로 화북을 장악하고 있던 장쭤린은 베이징을 내주고 자신의 본거지인 동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국민혁명군은 6월 8일 베이징에 입성했고 국민정부는 6월 20일, 직예성을 하북성으로, 베이징을 베이핑(북평)으로 개칭했다.] 그런데 만주에 대한 야욕을 불태우고 있던 [[관동군]]은 1928년 6월 4일 장쭤린을 심양 인근 황구툰(황고둔)에서 기차를 폭파시킴으로 암살했다. 중상을 입은 장쭤린은 병원에 실려가다가 숨졌다. 우선 봉천 군벌들은 장쭤린의 죽음을 비밀로 부치고 그저 상장군이 부상을 입었다는 발표만 하였다. 관동에 있던 장쉐량은 일본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봉천으로 귀환한 다음에 봉천의회의 추대에 따라 6월 20일[* 혹은 6월 19일.] 봉천군무독판대리에 취임하였다. 장쉐량은 취임하면서 난징 정부와 회담할 의사를 밝히며 당장 통일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분리독립할 뜻도 없다는 의사를 밝혔다. 장쉐량이 우려하고 있던 것은 국민당이 화북을 점령한 여세를 몰아 만주까지 쳐들어오는 것이었다. 거기에 장쉐량은 여러 계파로 사분오열된 국민당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국민당 중에서도 그나마 가장 안정적으로 보이는 장제스를 대화 파트너로 선택하여 접촉을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의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반일 성향이 짙은 국민 정부가 동북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일본 제국의 이권을 저해하는 행위로 간주, 장쉐량과 접촉하여 장제스와 관계를 가지지 말 것을 요구했다. 6월 25일과 6월 26일 양일에 걸쳐 일본의 봉천총영사 하야시 규지로가 장쉐량을 만나 일본의 뜻을 전달했다. >"지금 서둘러 남방에 대해 영합적 태도를 취할 필요는 없다. 얼마동안 현상을 유지하고 보경안민책으로써 형세를 관망하라." 6월 30일 장쉐량은 봉천독판대리에 취임, 장쭤린의 죽음을 발표한 다음에 내전의 정지, 우방과의 친목, 대내방침을 발표한 후 일본에 자신들의 방침이 친일이며 남방과 타협할 생각이 없다고 전했다. 장쉐량은 일본에 자금 지원을 대가로 일만 협력을 제의했다. 만약 일본이 4억엔의 차관을 제공한다면 만몽의 철도를 만철에 합병해주겠으며 일본과 전면적인 정치, 경제 분야의 합작을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만철과 관동군은 이 제안에 매우 긍정적이었으나 다나카 수상은 4억엔이나 되는 돈을 주었다간 장쉐량이 먹튀를 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여 이를 거부했다. 이에 실망한 장쉐량은 일본에 합작 중지를 통보했다. 7월 3일 장제스는 장쉐량에게 난징 [[중화민국/국민정부|국민정부]]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며 동북 3성 보안사령관의 자리를 내주었고 이에 장쉐량은 장제스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장쉐량은 봉천을 찾은 국민당 인사들에게 자신이 국민당에게 복종할 뜻이 있음을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역치의 수단이 국민회의를 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