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명성왕 (문단 편집) === 고구려, 백제 === 고구려 당시엔 국가 시조이니 당연히 숭배됐다. 《[[삼국사기]]》의 고구려 요동성이 [[당(통일왕조)|당]]군에게 공격받는 기록에서, [[요동성]]에는 그의 창과 갑옷을 모신 사당이 있고 무녀가 있다는 언급이 남아있다. 그리고 무녀의 예언을 듣고 처녀를 제물로 바치자, 무녀가 "주몽이 기뻐하시니 요동성은 함락되지 않을 것이다."는 말을 했지만 결국 함락됐다.[* 작가 최인호의 소설 《잃어버린 왕국》에서는 이 전설을 차용해서 요동성에 창과 '''활'''과 갑옷이 있는 사당이 있었고, 요동성은 이것만 믿다가 털린 후 사당과 유물이 통째로 불에 타는 걸로 서술한다. 그런데 작중에서 활은 공간 이동을 해서 안시성으로 날라간 후에 당태종 이세민을 저격하여 최종적으로 눈을 멀게 하고 산산히 부서진다.] [[중국]]의 역사서 《[[북사]]》에도 주몽 숭배 관련 기록이 있는데, >신묘가 두 군데 있는데, 하나는 '''부여신'''이라 하여 나무를 조각해 부인상을 만들었고, 하나는 '''고등신'''이라 하여 그들의 시조이며 부여신의 아들이라고 한다. 모두 관사를 설치해 놓고 사람을 보내 수호하는데 대체로 하백의 딸과 주몽이라고 한다. 라고 쓰고 있다. 동명성왕의 유물에 관련된 기록이 남은 건 저 정도뿐이지만, 나라의 시조신인 만큼 요동성에만 이런 사당이 있었을 리는 없고, 아마 주요 도시마다 사당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요동성]]은 크고 중요한 성이긴 했지만 서부 최외곽 지역의 성이자 비교적 후기에 편입되었던 곳으로 고구려의 전통적인 영토는 아니었다. 따라서 고구려의 내지에는 더 상징성이 큰 시설들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무녀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제사 의식에는 [[무속]]적인 요소가 강하게 있었던 듯하며, 고려 태조 [[왕건]]의 청동상을 바탕으로 초상이나 상(象)을 만들어서 모신 것으로 보는 설도 있다. 《고려도경》의 내용에 의하면 고려 중기에도 고구려와 비슷한 방식의 숭배가 내려오고 있었던 걸로 추정된다. 백제에선 동명왕의 아들 온조왕이 '동명묘'를 두어 제사지냈고, 또 국가시조로 '태조 도모[* 추모(鄒牟)의 다른 표기다. 당시 추 자는 '도, 두'로 읽힌 듯 하다. 신라는 추모를 중모(中牟)라고 표기했는데 중 자는 조선시대까지 '듕'으로 읽혔다.]대왕'을 언급하는 등 숭배 의식이 명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