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명성왕 (문단 편집) === 해씨? 고씨? === 성을 해씨에서 고씨로 고쳤다고 하나, [[아들]]인 [[유리명왕]] 대부터는 다시 해(解)씨(《[[삼국유사]]》·〈왕력〉)로 나오기 때문에, 고구려 초기 왕계에 의구심을 갖게 한다. 그런데 동명성왕만이 아니라 이후 고구려 왕족의 계보도에서 여러 문제가 발견되기 때문에 '''[[해씨 고구려설]]'''이 존재한다. 이에 따르면 아마 주몽의 원래 성씨는 고씨가 아닌 해씨였을 터인데 제6대왕인 [[태조대왕]] 때부터 고씨를 차용하게 되면서 [[소수림왕]]이 건국 군주의 성씨를 조작했을 것이라고 한다. 혹은, 해씨를 쓴 게 맞으나 원래는 방계였던 태조대왕계가 고씨라는 성을 쓰기 시작하면서 추모왕계에 대한 신성화 과정에서 동명성왕이 고씨임을 유난히 강조했다는 의견이 있다. 이러면 [[유리명왕]], [[대무신왕]] 등도 자연히 고씨가 되기 때문에 해씨를 성으로 썼던 역사가 묻힌 거라는 것이다. [[고구려]]뿐 아니라 [[백제]], [[신라]]도 초기 국왕 계보에서 사실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의 오류들을 범하고 있다. 중반기부터 왕위를 확립한 왕족들이 자신들의 정통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국왕 계보에 조작을 가했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그러기에 고구려 시조 주몽의 성씨와 그 계보에 대해선 논란이 클 수 밖에 없다. 《[[후한서]]》에 나오는 '고구려후(侯) 추'[* 정확히는 구려후 추(句驪侯 騶)]와 동일한 인물이라는 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실제로는 AD12 임신7월 한나라 전담(田譚)이 색두(索頭)와 서로싸우고 색두(索頭)가 현토태수 구추(勾鄒)에게 원병을 구하자 구추(勾鄒)는 연비(延丕)를 보내어 전담(田譚)을 공격해 죽였다 (유리왕31년) 三十一年 壬申七月 漢人田譚 與索頭sutou相爭 請救於勾鄒 勾鄒使延丕 擊譚殺之 譚不遜故也 《동국통감》에는 중국 장수 엄우가 '고구려 장수 후추'(高句麗將 侯鄒)를 잡았고, 그다음 중국이 왕을 '하구려후'라고 비하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