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명성왕 (문단 편집) === 고려~조선 === 고구려 시조에 대한 숭배는 고려, 조선 때에도 이어졌다.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고려시대엔 중화현 용산에 '동명왕묘(東明王廟)'가 있었고 평양 인리방엔 '동명성제사(東明聖帝祠)'가 있었다. 동명왕묘는 왕릉이 있던 곳이고[* 민간에선 진주묘(眞珠墓)라고 불렀다. 대한제국 때 [[동명왕릉]]으로 개칭됐다.] 동명성제사는 [[신사(무교)]]였다[* 고려 정부는 계절이 바뀔 때 동명성제사에 어압(국새가 찍힌 문서)을 보내 제사지냈고, 평양 관리는 매달 초하루, 보름마다 제사지냈다고 한다.]. 고려시대 당시 평양 지역의 동명왕 사랑은 매우 컸는데, 평양 각지에 동명왕과 관련된 전설이 잔뜩 남았다. 동명왕의 별궁인 [[구제궁]][* 《신증동국여지승람》엔 고려 예종이 쓴 구제궁시가 남아있다. 고려 고종 시기 최자가 쓴 <삼도부>에도 구제궁의 기록이 나온다.], 그가 건너 다닌 통한교(通漢橋), 기린마를 길들인 [[기린굴]], 승천할 때 밟았다는 [[조천석]]까지[* 이색이 쓴 시 '부벽루'에서 '(기)린마는 떠나 돌아오지 않으니 천손은 어디서 노니시는가?' 문구가 이 기린굴, 조천석 전설을 인용한 것이다.]. 중화현 용산엔 화반석으로 만든 [[동명왕릉]]이 있는데, 《제왕운기》는 동명왕이 승천해 돌아오지 않자 성자(聖子) 유리가 부왕의 옥 채찍을 용산에 묻었으니 바로 지금의 동명왕릉이라고 했다. 고려 시절 위 같은 동명왕 사랑 덕분에 왕은 신적 존재인 '동명성제(東明聖帝)'로 숭배됐는데, 《삼국유사》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왕을 동명성제 혹 동명제로 불렀고, 조천석을 설명할 때 성제를 상제(上帝)와 동격으로 서술했다.]. 또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평안도 안주목 은산현 관음봉에 천성사(天聖寺)가 있었는데, 민간에선 '동명성제'가 평양 조천궁에서 은산현 관음봉으로 강림할 때 궁전으로 쓰던 곳이 천성사였다고 전해졌다. 《고려도경》에 따르면 고려 개경 나성 안에 '동신사'가 있었는데, '동신성모'를 모신 [[신사(무교)]]였다. 저자 서긍은 이 동신성모는 '고려시조[*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을 가리킨다.]를 낳은 [[해모수|부여]]의 아내이자 [[하백]]의 딸'이라고 기록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동신성모는 선도산 성모라고 추측했다.]. 고려에선 동명왕 숭배의 연장선으로 [[유화부인]]도 모셨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엔 동명왕이 기자, 단군과 함께 평양의 삼성(三聖)으로 숭배됐다. 세종대왕은 평양부 의리방에 동명왕과 단군을 같이 제사지낼 전각을 만들었고[* 동명왕의 위패는 동쪽, 단군 위패는 서쪽에 두어 모두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보게 했다.], 세조는 동명왕의 위패를 '고구려시조 동명왕지위'로 고정했다[* 단군은 '조선시조 단군지위'.]. 영조는 이 전각에 [[숭령전]]이란 전호를 내렸다. 대한제국 때엔 각 도에서 지내는 제사로 동명왕릉과 숭령전 등을 지정했다. 국초 명나라를 공격하기로 한 요동 정벌 계획에선 관료들이 [[고구려|동명왕의 옛 강토]] 운운하는 계승 의식이 보인다[[http://sillok.history.go.kr/id/kca_10506027_00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