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림당 (문단 편집) == 역사 == 고헌성이 정부 쇄신을 강조하며 수차례 상소를 올렸지만, 당시 명나라의 황제는 정무 거부로 유명한 [[만력제]]였다. 결국 누차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헌성은 귀향을 선택하고 송대에 매우 유명했던 동림서원을 복구하고 유학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이렇게 되자 많은 유학자들이 동림서원을 찾아와 학문을 공부를 하면서 말기 증상을 보이던 명의 정책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이렇게 되자 동림서원이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게 되어 당대에 이들을 '동림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만력22년(1594년) 고헌성의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 인사 추천에 분개한 만력제가 고헌성을 파직하고 귀향시킨 이후, 절강성 영파(寧波) 출신 [[심일관]](沈一貫)을 예부상서 겸 동각대학사(東閣大學士)로 입각(內閣)시키고, 만력29년(1601년) 심일관을 수보내각대학사(首輔內閣大學士)로 임명하였다. 심일관은 요종문(姚宗文), 유정원(劉廷元), 방종철(方從哲) 등 절강 출신 사인들을 기용하면서 절당(浙黨)을 조직하였다. 이후, 관응진(官應震)과 오량사(吳亮嗣)를 주축으로 하는 초당(楚黨), 산동 출신 기시교(亓詩教)를 주축으로 하는 제당(齊黨)이 절당에 가세하여 제초절당(齊楚浙黨)이 만들어졌다. 제초절당은 '비동림당(非東林黨) 또는 반동림당(反東林黨)'이라 지칭되었고, 동림당을 공격하였으니, 이를 이르러 동림전쟁(東林戰爭)이라 한다. 만력제가 1620년 붕어하고 [[천계제]]가 즉위하자[* 중간 [[태창제]]가 즉위했으나 한달만에 사망했다.] 동림당이 정치 일선에 잠시 복귀했으나[* [[장거정]]의 복권이 이 시기 동림당 손에서 이뤄졌다.], 천계제 역시 정무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권력을 환관 [[위충현]]에게 몰아줬다. 위충현은 주자학을 기반으로 자신의 권력 남용을 비판하는 동림당을 눈에 가시로 여기고 반동림당 세력을 결집해 동림당에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고 아예 1625년에는 학문적 근거지였던 동림서원도 파괴해 권력 일선에서 다시 몰아냈다. [[숭정제]]가 즉위하여 위충헌이 몰락하자 동림당은 다시 재건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