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래 (문단 편집) == 역사 == [[삼국시대]] 초반에 [[신라]]가 여기까지 진출하기 전에 [[해운대]] 지역에 [[장산]]국(萇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으로 소국을 이루었다. [[신라]]의 장군 [[거도]]가 [[기병]]의 움직임을 말타기 행사(馬叔)로 위장해서 거칠산국이 방심하게 한 틈에 공격해 멸망시킨 후 신라의 거칠산군(居柒山郡)이 되었고 757년([[경덕왕]] 16년)에 현재까지 쓰이는 [[지명]]인 동래군(東萊郡)으로 개칭되었다. 동래군은 1018년(현종 9년)에 현으로 격하되었다. 한때 [[독로국]](瀆盧國)의 독로를 동래의 어원으로 여겼으나 현재는 아니라고 본다.[* 향가 25수를 처음으로 해석한 [[양주동]] 박사 또한 동래를 독로와 연결시키기 어렵다고 보았고 대다수 언어학자들의 견해 또한 마찬가지로 현재는 독로를 동래의 어원으로 연관시키는 음운설은 부정된다. [[http://www.kci.go.kr/kciportal/landing/article.kci?arti_id=ART001574027#none|#]] [[http://m.blog.daum.net/bangyang/144?np_nil_b=-2|#]]] 1547년에 승격되었다가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에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고, [[임진왜란]]이 종결 된 후인 1599년 다시 동래도호부로 복위되었다.[*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814445&cid=55778&categoryId=56209|출처]]] [[조선]] 시대에는 초량에 [[왜관]](倭館)이 설치되어 [[일본]]과의 무역 거점 [[도시]]로 기능하였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조선 통신사]]를 보낸 것처럼 역으로 일본에서도 조선으로 사신단이 왔지만 이들은 조선 수도 [[한양]]까지는 가지 않고 [[부산]] [[동래]]부까지만 왔다 갔다. 임진왜란의 기억으로 조선은 [[에도 막부]] 정권도 완전히 믿지 못했는데 일본 사신단이 한양으로 가면서 지리를 익혀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 정부는 일본 사신에게 얕잡히지 않기 위해 동래의 격을 도호부로 높여 중요시했다. 한편 훗날 도시의 이름이 되는 부산(부산포, [[부산진]])이라는 이름은 이 당시 동래도호부 예하의 포구 및 [[진]](鎭)에 불과했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3%EB%B6%80%EC%A0%9C.gif|width=400]] [[1895년]] [[23부제]]를 시행했을 때는 [[포항시]], [[경주시]], [[울산광역시]], [[양산시]] 등 경상도 동쪽을 통째로 떼어서 동래부라고 명명했는데(위의 연두색 범위), 이건 저 안에서 가장 대표적인 도시가 동래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아래에 설명할 도시로서의 동래는 동래부 안의 동래군이었다. 이듬해 13도제 시행으로 동래부는 반반 나눠서 [[경상북도]]와 [[경상남도]]의 일부가 되었고, 동래군은 동래부가 되었다. 같은 용어가 전혀 다른 범위를 포함하는 것으로 휙휙 바뀌므로 헷갈리기 쉽다. [[파일:attachment/동래/map1.jpg]] 1896년의 모습. [[양산시|양산]]의 모습이 심히 이상한 것은 무시하자[* 이러한 형태의 행정구역을 [[땅거스러미]]라 하며 조선시대에는 '견아상입지'라고 불렀다. 항목 참고. 이러한 곳들은 [[1906년]]에 대대적으로 정리되었다.] [[파일:attachment/동래/map2.jpg]] 1914년 [[1910년]] [[일제강점기]]의 시작과 함께 동래부가 잠시 통째로 부산부로 개칭되었으며, [[1914년]]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부군면 통폐합]]으로 부산부의 영역이 개항장 일대로 축소되고, 부산부의 잔여지역을 동래군으로 분리하였다. 이와 함께 별개의 행정구역이었던 [[기장군]]이 동래군에 병합되었다. 동래군청은 기존 동래부 관아(동헌)를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기장군 지역만 남은 동래군이 1973년 양산군에 병합될 때까지 현역 군청사로 쓰였다. '''조선시대 건축물'''이 현대에까지 현역 관공서 건물로 쓰인 특이한 케이스.[* 심지어 1973년 이후에도 동래부동헌 건물은 '''[[양산시|양산군]]보건소 동부지소'''로 쓰였다고 한다. 인천 문학초등학교에 있는 오리지널 인천도호부청사 건물도 부천군청, 인천시 문학출장소 건물로 쓰인 적이 있었다.] [[파일:attachment/동래/map3.jpg]] 1945년 광복 직후 일제강점기와 [[8.15 광복]] 이후를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동래군은 부산시에 편입, 흡수되었으며, [[1963년]]에는 현 [[기장군]]과 동일한 영역만을 점유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73년]] 최종적으로 폐지되고 [[양산시|양산군]]에 병합됨으로써 동래군은 소멸되었다.[* 이후 동래군 영역은 [[울주군]]에서 잠시 편입하였다가 도로 환원된 서생면 지역을 제외하고 [[1995년]]에 다시 부산광역시로 돌아가면서 기장군으로 다시 부활하게 된다.] 한편, [[1957년]] 부산시에 [[구(행정구역)|구(區)]]제가 실시되면서 아래 항목의 [[동래구]]가 설치되었으며[* 즉, [[1957년]]부터 [[1973년]]까지는 '부산시 동래구'와 '경상남도 동래군'이 함께 존재했던 것이다.], 폐지된 동래군을 대신하여 동래구가 부산의 옛 이름인 '동래'의 맥을 잇고 있다. 위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원래는 동래가 상위 지명, 부산이 그 하위 지명이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주객전도|부산과 동래의 지명의 지위가 뒤바뀐 것]]이다. 일제강점기가 아니었다면 동래광역시 부산구가 되었을 것이다. 비슷한 사례로 회덕군 '''대전리'''가 [[광역시]]의 이름으로 격상되고, 상위 지명이었던 회덕은 회덕동으로만 남아버린 [[대전광역시]]의 사례가 있다. 동래는 그래도 [[구(행정구역)|구]] 이름으로 계승됐으니 그나마 선방[* 다만 '회덕'은 온전히 현재의 구 이름으로 계승되진 못했지만, 옛 대전시의 외곽 읍면지역을 관할하던 [[대덕군]]을 거쳐 현 대전광역시 북부를 관할하는 [[대덕구]]의 '덕'으로써 계승됐다. 참고로 '대덕'의 '대'는 대전.] [[구미시]]도 원래 선산군 구미읍이었지만, 구미읍이 시로 승격돼 선산군에서 분리됐다가 [[1995년]] [[도농통합시]]가 출범하면서 역으로 구미시가 선산군을 병합하게 되면서 선산이란 지명은 기존 선산군청 소재지였던 선산읍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위상이 뒤바뀌었다. 부산과 통합된 이후에도 1970~80년대까지는 '부산'과는 다른 동래 지역만의 정체성이 남아있었다.[* 비슷하게 [[광주광역시]] [[광산구]], [[인천광역시]] [[부평구]], [[창원시]] [[마산회원구]]와 [[마산합포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사천시]] 시내동지역(구 [[삼천포시]]), [[성남시]] [[분당구]], [[고양시]] [[일산동구]]와 [[일산서구]], [[보성군]] [[벌교읍]] 등 다른 도시에도 비슷한 사례가 많다. 다만 부평의 경우는 원인천과는 역사적으로 별개의 고을이기 때문에 1:1 비교는 곤란하다. 영등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동래와 부산 시가지 사이의 미개발 지역까지 부산 시가지가 확장되면서 연담화되어 지금은 완전히 부산이라는 도시의 일부로 동화된 상태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