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독 (문단 편집) === 예술 === 공산주의 국가인 동독에서 예술은 어디까지나 '''[[인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인민대중을 위한 위로의 매개로서 예술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공연은 입장료가 없었다. 대부분의 예술가는 국가에 소속되어 월급을 받으며 대중을 위해 창작하고 공연한다. 흥행을 목적으로 하는 공연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에는 노동자들이 [[오페라]]나 [[관현악]] 공연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던 것은 장점이라고 한다. 게다가 공산주의 국가들 중에서도 상당히 잘 사는 축에 속한 동독이었기에, 지역마다 도서관이나 미술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통일 이후에는 입장료가 비싸져서 동독 시절에는 거의 공짜로 매주 1~2번은 관람하던 [[음악회]]나 [[공연]] 등을 보기 힘들어졌다고 하고 각 동네에 한 곳 정도는 있던 [[도서관]]과 문화회관 역시 폐관하는 경우도 잦아졌기에 도서관에서 [[책]]을 보려면 멀리 걸어다녀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이렇게 된 이유는 통일 이후 중앙정부에서 지방정부로 예산업무가 넘어갔는데 서독 정부에서 예산을 많이 줄 처지가 아니고 동독 내의 [[지방정부]]도 인구유출이나 [[실업|실업난]] 등의 문제로 재정상황이 영 좋지 않았던지라 문화 예술에 대한 지원[[예산]]을 확 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회관이나 [[도서관]]을 폐관한다거나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동독 지역에서도 [[영화]]가 성행했는데, 특히 아이들을 위한 영화가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또한 [[영화관]]에서 자국의 영화 말고도 주로 동구권의 영화들이 상영되었지만 가끔씩 서구권의 영화들도 상영되었다. 동독 출신의 사람들이 통일 이후의 변화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먹고 사는 건 지금이 더 나은데, 문화적으로는 그 때가 오히려 더 풍요로웠다"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