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독 (문단 편집) == 정치 == ||[[파일:1986-DDR-election.jpg|width=100%]]|| || "6월 8일 우리의 투표를 위해" 1986년 동독 총선 포스터 ||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이 유일 집권당이었고, 그 위성정당으로 [[독일 기독교민주연합(동독)|동독 기독교민주연합]], [[독일 자유민주당(동독)|동독 자유민주당]], [[독일 민족민주당(동독)|독일 민족민주당]][* 동독으로 전향한 나치 잔당을 포섭하기 위한 정당이었다.], [[독일 민주농민당]]이 있었다. 통일 이후에 [[기민련#s-7|동독 기독교민주연합]]과 민주농민당은 서독의 [[기독교민주연합]]에, 자유민주당과 민족민주당은 서독의 [[자유민주당(독일)|자유민주당]]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이들 5개 정당 외에 자유독일청년단, 자유독일노동조합연맹[* 사회주의통일당과 연계된 동독의 사실상 유일한 [[노동조합]]연맹이었다.], 독일민주여성동맹, 동독문화협회 등의 어용 외곽단체가 있었는데, 이들은 동독 인민의회에서 의석을 확보할 수 있었다. *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 127석 * 자유독일노동조합연맹(FDGB) 68석 * [[독일 기독교민주연합(동독)|독일 기독교민주연합]](CDU) 52석 * [[독일 자유민주당(동독)|독일 자유민주당]](LDPD) 52석 * [[독일 민주농민당]](DBD) 52석 * [[독일 민족민주당(동독)|독일 민족민주당]](NDPD) 52석 * 자유독일청년단(FDJ) 50석 * 독일민주여성동맹(DFD) 35석 * 동독문화협회(KB) 22석 이후 공산주의 체제가 사실상 와해된 [[1990년]] 3월이 되어서야 동독에서 분단 45년 만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유 선거가 치러질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앙겔라 메르켈]]은 정계에 입문하여 [[기민련#s-7|동독 기독교민주연합]]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비밀경찰]]인 [[슈타지]]가 악명이 높아서, 흔히 [[미국의 법 집행|미국 경찰]], [[대한민국 경찰청|한국 경찰]], [[중화인민공화국 인민경찰|중국 공안]] 하면서 셋 중 가장 무식하게 때려잡는 중국 공안(...) [[유머]]의 원형이 바로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가보안위원회|KGB]], [[슈타지]] 셋을 비교한 유머다. 해당 항목을 참고하면 알 수 있겠지만, 동독 전체가 대단히 치밀한 감시체제 하에 있었다. 다만 [[북한]]이나 [[중국]]과 비교하면 언론의 자유는 어느정도 높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같은 동유럽 공산권 중에서는 동독이 억압이 심한 편이었다. 국민공산주의 하에서 막나가던 루마니아를 제외하고는 동독은 체코슬로바키아와 함께 프리덤하우스 자유 지수에서 7등급으로 최악의 등급을 받았다. 폴란드, 헝가리, 심지어 소련조차도 6등급을 받았다. 실제로도 소련과 폴란드에서는 당내 과두정이 잘 돌아갔지만, 동독이나 체코슬로바키아는 실질적으로 전제정이나 다름없었다.] [[1970년대]] 들어서부터는 집에 안테나 달고 [[ARD|서독]] [[ZDF|방송]]을 시청하는 것도 사실상 묵인받았다. 사실 아예 국토 한가운데인 서베를린에서 전파를 쏘는데다가 컬러 TV 송출 방식이 서독은 PAL, 동독은 SECAM으로 다르긴 했어도 어쨌든 남한의 NTSC, 북한의 PAL처럼 아예 호환이 되지 않는 건 아니라서 흑백으로 볼 수 있었다. 거기에다가 방해전파를 쏘려고 해도 채널번호가 같아서 방해전파 쏘기가 힘들었고, 또한 서독 TV 프로그램이 동독 TV 프로그램보다 훨씬 신뢰성이 높아서 고위 관료들이나 상당수 당원 조차도 서독 TV를 보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런 판이니 기껏 안테나 단속을 해봐야 허튼 일에 불과했다. 결국 1970년대 들어 서독 TV 시청을 방해하는 행위를 중단했고, [[1980년대]]부터는 아예 합법화해 버렸다. 물론 그 와중에도 메클렌주르크포어포메른주 동부, 작센주 동부 지역 같이 서독에서 쏘는 전파가 닿지 않아 서독 TV를 못 보는 지역도 있긴 했다. 동독 사람들이나 서독 사람들이나 이 지역을 가리켜 '''[[https://en.m.wikipedia.org/wiki/Tal_der_Ahnungslosen|무지의 골짜기(Tal der Ahnungslosen)]]'''라고 불렀다. 또한 평소 당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받은 사람이라면, 항의 편지를 쓰는 것 정도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체제 내 개혁파였기 때문. 영화 [[굿바이 레닌]]을 보면 평소부터 열성당원으로 활동하던 사람이 배급티켓으로 받아온 옷의 사이즈가 엉터리라면서 '''만약 우리의 체격이 당의 충직한 일꾼으로써 부적절한 것이라면, 시정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비아냥거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거 실화 맞다. 사실 웬만한 [[공산주의]] 국가들은 대부분 이랬고 심지어 가장 막장이라는 북한조차도 어느 정도는 문제 제기를 허용해줬다.~~물론 그 이상 나가면 감옥 직행이었지만~~ 정권에 대한 정면도전이나 지도자에 대한 공격은 용납하지 않아도, 이번 달 배급에 문제가 있다~, 우리 동네 공장 돌아가는 것이 개판이더라~ 라는 식의 지엽적이고 사소한 문제에 대한 비판은 허용되었고 언론에도 실렸다.[* 공산권 국가들이 민주화 된 이후 주민들이 큰 혼란을 겪었던 것 중 하나가, 그전까지는 당국가 체제에서 지역 당조직에 직소하면 민원이 바로바로 해결이 되었는데 이제는 당이 여럿이니 어디에 민원을 넣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멀리 갈 것 없이 [[싱가포르]]의 시민 및 언론 자유 수준과 거의 동일하다. 정치적이거나 외부에서 볼 때 국가(=당)의 치부를 드러낼 수 있는 의제는 절대로 건드릴 수 없지만 다른 의제들은 얼마든지 제안 및 항의가 가능하다.] 다만, 언론의 자유고 뭐고 악명높은 [[굴라그|노동강제수용소]]는 이 나라에도 있었다. 요컨데, 가벼운 불평불만자 정도는 터치하지 않았지만 정말 정권에 도전했다가는 개박살이 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문의 경우, 육체적인 고문보다는 취조실의 환경을 이용하여 심리적으로 나약하게 만드는 등 정신적인 고문이 주로 행해졌다. 과거 [[나치 독일]]에 대해서는 동독도 만행을 인정하고 전범들을 처벌했으나, 사죄와 배상에 대해서는 '''"우리 세대가 한 게 아니다"'''라면서 모르쇠 배째라는 식의 입장을 보였다. 정확히는 공산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반나치 투쟁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이것을 사회주의통일당의 정당성으로 연결하는 식으로 가르쳤다. 그리고 이는 결과적으로 책임 의식이 단절되는 양상을 보였다.[* 통일 이후 구 동독 지역에서 [[네오 나치]] 활동이 상대적으로 활발한 것도 이런 책임 의식의 단절이 작용한다는 해석이 있다. 물론 여기엔 아직까지도 개선되지 않는 구 동독과 서독의 경제적 격차 문제 등 복합적인 원인이 있다. [[바이에른]]이 나치가 처음 생겨나고 성장한 곳이기는 하나 [[대공황]] 이후부터는 동독이 자리잡은 구 프로이센 지역이 나치의 총본산이 되었다. 1933년 나치가 집권하기 직전 치른 총선에서 나치의 지지율이 가장 높았던 곳이 바로 동프로이센, 포메른, 슐레지엔, 노이마르크 일대를 위시로 한 구 프로이센 지역이다.] 동독은 서독처럼 "바이마르 공화국 → 나치 독일 → 군정기 → 분단"이 아니라 "바이마르 공화국 → 공산주의자들의 반나치 투쟁기 → 군정기 → 분단" 이렇게 가르쳤다. 이는 건국 직후부터 나치의 만행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이를 스스로의 역사로 여겨 사죄와 배상에도 나름대로 적극적이었던 [[서독]]과는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대신 스탈린주의 국가답게 나치 관련자 처벌에는 힘썼다고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