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구(울산광역시) (문단 편집) == 역사 == 조선시대부터 방어가 많이 나는 곳이라 하여 방어진이라고 불렸다. 조선시대 방어진을 표기할 때는 방어 방(魴) 자와 본뜰 방(方) 자가 혼용되었는데 당시 방어 방 자를 쓰는 방어진은 특정 지역의 지명보다는 어류를 잡거나 운송하는 단순한 나루터를 의미하는 말에 가까웠다고 추정된다. 조선시대 전기부터 목장이 건설되어 현재의 남목 일대에는 목장, 방어동 일대에는 어항이 있었다. 3포 개항 및 왜란이 일어난 염포(현 북구 염포동) 또한 본래는 동면의 관할이었다.[* 1985년 구 설치 당시 중구에 속했으며, 광역시 승격 과정에서 잠시 동구로 환원되었다가 최종적으로 북구에 소속되었다.] [[1643년 울산 대지진]]당시 사실상 이 일대는 모조리 [[폐허]]로 변해버리기도 하였다. 본래 조선 말까지 180여명 정도만이 거주하는 조그마한 어촌이었으나 개화기 일본인들이 조업을 위해 출입하기 시작하여 러일전쟁 이후 일본인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은 주로 방어진항을 중심으로 정착했는데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이주 하는 곳 중 한 곳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이전인 1909년에 이미 일본인 이주민이 600명을 넘어섰다. 이 시기부터 방어진의 방은 본뜰 방(方) 자로 쓰이게 되는데 당시 일본에는 방어 방이라는 한자가 생소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부터 본격적으로 어항이 발달하기 시작하여 일본인들의 유입이 급속도로 늘었다. 1921년에는 방어진의 인구가 5천 명을 넘고[* 일본인의 수가 조선인보다도 많았다.] 성어기에 출입하는 인구가 15,000명에 이르며 조선 총 어획량의 10%를 차지할 정도로 번성했다. 하지만 방어진 거주민의 25%만이 어업에 종사하고 나머지는 어부를 상대로 영업을 했다.[* 대부분의 시설은 일본인의 것이었고 조선인들은 이런 시설에서 잡무를 도맡아 했다.] 이러한 급속한 발전으로 1931년 방어진면으로 개칭하였으며, 1937년 울산읍에 이어 울산군에서 두번째로 읍으로 승격했으나 일본인에 의해 발전한 방어진은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사라지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파일:옛 동구청(울산).jpg|width=100%]]|| || 옛 동구청의 모습 || 1962년 울산군 울산읍, 방어진읍 등이 울산시로 승격하면서 기존 방어진읍 지역에 방어진출장소가 설치됐고, 72년 현대조선 울산조선소(현 HD현대중공업, 현대미포조선)가 세워지면서 본격적으로 공업화, 시가화가 이루어진다. 이후 울산시의 시세 확장에 따라 중구 방어진출장소를 거쳐 최종적으로 동구로 분구되었고 광역시 승격과 함께 자치구로 승격하여 오늘에 이른다. 1988년 중구 방어진출장소에서 분구될 당시에는 '''방어진구'''라는 명칭을 사용할 계획이었으나, 최종적으로 현재의 '동구'로 결정되었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7122100329210001&edtNo=3&printCount=1&publishDate=1987-12-21&officeId=00032&pageNo=10&printNo=12995&publishType=0002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