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경(고려) (문단 편집) == 개요 == 고려 초중기의 3경[* 개경([[개성시|개성]]), 서경([[평양시|평양]]), 동경([[경주시|경주]]).]중 하나로 현재의 [[경상북도]] [[경주시]]이다. 비록 [[신라]]는 멸망했지만 그 과정에서 [[태조(고려)|왕건]]은 신라의 구 세력을 그대로 포용했고, 옛 신라의 수도 [[서라벌|금성]]은 동경으로 개칭되어 고려 초중기 동안에는 계속 중요한 도시로 남아있었다. 사실 수도 개경에도 [[황룡사]] 9층 목탑보다 높은 건물은 없었을 정도니[* 개경에도 [[흥왕사]]처럼, 황룡사보다 옆으로 더 넓은 사찰은 있었다. 흥왕사는 조선의 [[경복궁]]과 맞먹는 면적을 자랑했다.] 고려시대에도 신라 때만큼은 아니더라도 개경 사람들이 감탄할 정도로 크고 화려한 도시를 유지했다. 경주가 개성의 동남쪽이라지만 동쪽보단 남쪽에 더 가까운데도 동경이라 이름지은 이유에 대해 [[주보돈]] 교수는 위 신라 단락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미 신라 때부터 경주를 동경이라는 별칭으로 불렀기 때문에 고려에서도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평양이 개경의 서쪽보다는 북쪽에 가까운데도 고려시대에 북경이 아닌 서경이라 이름지은 이유도 엄연히 고구려와 신라를 모두 통합했다는 입장인 고려 정부가 신라의 옛 수도인 동경과 대등하게 대비하기 위해서 고구려의 옛 수도 평양을 서경으로 붙였다고 주보돈 교수는 추정하였다.] 그러다 이후 [[신라부흥운동]]의 성격이 있었던 [[동경민란]]의 진압 이후 경주로 격하되어[* 고려, 조선시대에는 이런 식으로 반란이 일어나면 행정구역의 격을 낮추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3경에서도 빠지고 남경([[서울특별시]])이 추가되었고, [[몽골 제국]]군의 침략으로 황룡사 목탑이 불타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곧 동경으로 복권되어 원간섭기 이후의 외왕내제 체제가 붕괴되기 전까지 여전히 고려의 주요 대표도시로 기능했다. 흔히들 고려 후기에 3경에서 동경이 빠지고 남경이 그 자리에 들어갔다는 식으로 아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는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고려 후기 [[충렬왕]] 34년([[1308년]]) 때 [[남경(고려)|남경]]과 동시에 각각 계림부와 [[남경(고려)|한양부]]로 격하되었다. 즉 고려의 3경제도가 끝날 때까지 경주는 동경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최상급 행정기관인 5개 부(府) 중 하나였을 정도로 위상은 상당했고, [[경상도]]의 여러 대도시와 더불어[* 대표적으로 [[상주시]], [[진주시]], [[안동시]], [[성주군]].] 경상도 내에서 손꼽히는 대도시였다. 거기다가 당시에는 경상도 자체가 인구가 많다 보니 전국으로 치더라도 손꼽히는 대도시였다.[* [[18세기]]의 인구 통계에 따르면 5번째로 인구가 많은 곳이었다.] [[일제강점기]] 초반에도 전국 도시들 중에서 최상위권에 위치할 정도로 위상은 여전하였으나 산업화의 진전과 더불어 [[부산]], [[대구광역시|대구]]가 경주를 역전하여 전국 대도시의 위상을 뺏겼다. 나아가 현대에는 오히려 옛날에 경주 주변의 외항으로 경주에 장 보고 문화생활하러 오던 옆동네 [[포항]], [[울산]]한테도 밀리는 지방 소도시로 전락하게 되었다(...). 개의 품종 중 하나인 [[동경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 조선 [[헌종(조선)|헌종]] 때인 1845년에 나온 경주지역 지리지 이름도 [[동경잡기]](東京雜記)다. [[분류:고려의 행정구역]][[분류:경주시의 역사]]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동경, version=13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