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거정부 (문단 편집) == 한국에서 == [[한국]]에서도 한번 동거정부가 구성된 적이 있었다. 1956년 5월 15일에 열린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의 [[이승만]]이 대통령에, 민주당의 [[장면]]이 부통령에 선출된 것. 당시 선거에서 러닝메이트 제도를 채택하지 않고 정·부통령을 따로 각각 선출하도록 되어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결과에 격앙한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에 의해 [[3.15 부정선거]]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60년 선거에서 사실 대통령은 이승만 당선이 확실했다. 자유당과 경쟁하던 [[민주당(1955년)|민주당]], [[진보당(1956년)|진보당]]의 경우 진보당은 [[진보당 사건]]으로 해산되었고 대통령 후보 [[조봉암]]은 사형당해 대통령 후보를 낼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고 민주당은 후보인 [[조병옥]]이 죽어 대통령 후보가 [[공석]]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민주당 부통령 후보 장면이었는데, 당시 헌법으로는 대통령 유고시 부통령이 직위를 승계하는 것이 문제였다. 이승만은 당시 80세가 넘은 고령인지라 자유당 입장에서는 대통령이 아니라 부통령을 확실하게 당선시켜야 했다. 하지만 이미 1956년에 이기붕이 장면에게 패배했다 보니 조급해져서 부정선거를 거하게 벌인 것이다. 제2공화국 시기에도 사실상의 동거 정부가 이루어진다. 1960년 7월 29일의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의 압승을 거두어 명목상으론 대통령과 국무총리 모두 민주당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실상은 달랐다. [[제4대 대통령 선거|제4대 대선]]에서 대통령에는 민주당 구파의 [[윤보선]]이 당선되었다. 뒤이어 총리로 역시 민주당 구파의 [[김도연(1894)|김도연]]이 지명을 받았으나 만주당 신파의 반대표로 인준이 거부된다. 마지못해 윤보선은 민주당 신파의 장면을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하고 2차 투표에서 장면이 총리로 선출된다. 구파와 신파는 공식적으로는 모두 민주당 소속이었지만 이들은 정치적 기반도 출신 성분도 완전히 달랐다.[* 구파는 다툼 끝에 [[신민당(1960년)|신민당]]을 만들고 [[5.16 군사정변]] 이후에도 구파는 [[민정당]]을 신파는 [[재건민주당]]을 설립하며 갈라섰다.] 예를 들어 장면의 경우 [[흥사단]] 출신의 가톨릭 교육자였지만 윤보선은 구한말 유력가 [[해평 윤씨]] 집안 출신의 귀족적 엘리트였다. 당시 대통령은 공식적으로는 상징적 국가원수이자 무소속이어야 했지만 윤보선은 그런 위치로 있을 생각이 없었기에 [[장면 내각]]은 구파와 신파간의 다툼으로 각료가 끊임없이 바뀌었다. 이로부터 61년 뒤인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초창기에 인수위 없이[* 전임 대통령인 [[박근혜]]가 탄핵으로 임기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물러나면서 대선이 [[궐위에 의한 선거]]로 치러졌기 때문이다. 대신 [[국정기획자문위원회]]라는 이름의 인수위를 대체할 조직을 구성했다.] 전임 [[박근혜 정부]]의 각료들을 바로 승계받자 일부 언론에서 동거정부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나 [[유시민]] 작가는 시사프로그램을 통해 이런 표현에 대해 "이는 문재인 정부 조각 때까지 인수인계 차원에서 전임 정부 장관이 남아있는 거지 동거정부의 개념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프랑스의 사례만 봐도, 아예 대통령과 총리(내각)가 권력을 양분해서 같이 몇년은 일해야 동거정부로 불릴만 하다. 차라리 1998년, [[DJP연합]]으로 구성된 국민의 정부(1998년 2월~2001년 9월 한정)가 동거정부로 불릴만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