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돌궐 (문단 편집) === 동돌궐(583~630) === 북주 시절 [[우문태]] 밑에 있었던 [[양충]]의 아들 [[문제(수)|양견]]은 돌궐 군대의 협력을 받아 세력을 넓혔고, 훗날 [[수나라]]를 건국했다(581). 양견이 황제가 되기 전인 북주 [[무제(북주)|무제]] 건덕 원년(572) 동돌궐은 장안까지 쳐들어가 백성 60,000명을 포로로 잡아 끌고 갔다. 북주 [[정제(북주)|정제]] 대상 원년(579) 돌궐이 다시 장안에 들어가 나가질 않자 제국의 실권을 쥐고 있었던 양견은 공녀를 보내기로 하고 달래어 장안에서 철수시켰다. 583년 동•서돌궐의 분열은 [[문제(수)|수 문제]] 양견의 이간책까지 겹쳐 격화되었다. 궁지에 몰린 동돌궐의 제5대 [[사발략가한]]은 [[수나라]]에 지원을 요청했고, 587년 그의 동생이었던 제6대 '''[[막하가한]]'''(재위 587~588)은 동부를 되찾았으나 서돌궐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이후 제7대 '''[[힐가시다나도람가한|도람가한]]'''(재위 588~600)을 거쳐 제8대 '''[[의리진두계민가한|계민가한]]'''(재위 599~609)의 치세때 동돌궐은 서돌궐을 이기기 위해 [[수나라]]에 일시적으로 협력했다. 하지만 [[수나라]]의 폭군 [[양제(수)|양제]] 양광이 [[고구려]]와의 [[고구려-수 전쟁|성과 없는 대전쟁]]으로 인해 국력을 소모하고 결국 내란으로 붕괴되자, 그 틈을 노려 수나라의 복속에서 벗어나 제9대 [[시필가한]](재위 609~619)과 제10대 [[처라가한]](재위 619~620)때 다시 세력을 길러 중원의 쟁패전에 개입하며 군벌들을 후원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 이때 돌궐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마궁수]]가 무려 '''400,000명'''이나 되었을 만큼 그 힘이 강성했고, [[두건덕]] 같은 중원의 군벌들은 돌궐의 힘을 빌려 황제가 되어 보려는 속셈에서 돌궐에 앞다투어 사신들을 보냈는데, 그들의 수가 하도 많아서 길가에 돌궐로 가거나 중원으로 돌아오는 사신들의 행렬이 서로 마주칠 정도였다고 한다.] 시해당한 [[양제(수)|수 양제]]의 손자 양정도를 내세워 돌궐의 꼭두각시로서의 수나라의 재건을 시도하기도 했고, [[당나라]]를 세운 당국공 [[고조(당)|이연]]도 돌궐의 신하를 칭하는 굴욕을 맛보며 돌궐군의 도움을 받아 [[시안시|장안]]으로 진격하기도 했다. 이때 돌궐군이 장안을 정복하고 유린했는데 대부분의 장안 귀족들이 끌려가 꽤 긴 시간 동안 장안에 공백이 생길 정도였다. 또한 신생 국가였던 당나라는 돌궐에 복속하여 가한을 섬겼다[* 사실 초창기의 당나라는 힘이 약하여 스스로를 가리켜 돌궐에 대해 신하라고 칭했다. 이때의 정황을 가리켜 역사 기록에는 "고조(이연)가 즉위하면서 전후로 상사(賞賜)를 내린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시필(始畢)칸은 스스로 공이 크다고 생각하여 더욱 오만해졌다. 매번 사자를 장안으로 보낼 때마다, 매우 무례하였다. 고조는 중원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매번 용인해주었다"라고 언급되었다[[http://m.blog.daum.net/shanghaicrab/10276860?np_nil_b=1&categoryId=459314|#]]]. 이때 동돌궐은 [[당나라]]에 대항하여 동쪽의 [[고구려]]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절치부심하던 당나라는 돌궐을 상대로 외교적인 이간책을 시도했다. [[설연타]]의 반란 진압 실패로 제11대 '''[[힐리가한]]'''(재위 620~630)으로부터 학대를 받아 불만을 품게 된 그의 조카 돌리와 욱사설이 당나라로 투항해왔고, [[설연타]]를 비롯한 철륵계 부족들도 당 [[태종(당)|태종]] 이세민의 사주를 받아 동돌궐로부터 등을 돌렸다. 게다가 수년 동안 큰 눈이 많이 내려 유목하던 가축들이 폐사하는 악재가 겹치자 당나라는 동돌궐의 쇠락하고 분열된 상황을 간파하고, 서기 630년에 대대적으로 지금의 [[내몽골]] 지역을 기습 공격해 [[힐리가한]]을 생포하고, 일시적으로 멸망시켰다. 이때부터를 당나라의 '''기미지배기'''(630~687)라고 한다. 하지만 동돌궐의 가한이 포로로 잡혀 공백기가 생긴 것이지, 광활한 영토 전체가 멸망한 것이 아니었다. 힐리가한이 잡히고, 동돌궐 유민들 대부분이 [[서돌궐]]로 이동했지만 일부는 내몽골에 그대로 남았고, 634~645년에 [[만리장성]] 근처 10개 주에 이주했다. 그러나 639년 동돌궐 수령 결사솔의 반란을 계기로 다시 원래 살던 곳으로 재이주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