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돈목방교령 (문단 편집) == 배경 == 1934년 만주 대흉작으로 인한 경제위기와 날로 증강되는 소련의 극동 군사력에 불안을 품은 일본 군부는 중국의 화북 5개성을 침탈하여 이를 일본 제국을 위한 블록 경제권 및 소련에 맞서기 위한 완충지대, 배후지대로 삼아야 한다고 보고 1935년부터 [[화북분리공작]]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35년 5월, [[하북 사건]]이 일어나 친일 언론인들이 암살되고 항일의용군 손영근 부대와 일본군이 교전하는 일이 있자 일본군은 국민정부가 [[남의사]]를 이용하여 테러를 자행하고 불법적으로 토비를 지원했다고 주장하며 [[하매 협정]]의 체결을 강요하였다.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무력 사용을 불사하겠다고 노골적인 위협을 가했다. 당시 군사위원장인 [[장제스]]는 사천성에서 [[대장정]] 중인 [[중국 공산당]]을 토벌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난징의 국민정부는 [[행정원장]] 겸 외교부장 [[왕징웨이]]가 주도하고 있었는데 왕징웨이는 국민정부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대일 유화론자였으며 하매 협정의 협상 당사자인 베이핑 군사위원회 분회 위원장 [[허잉친]] 역시 대일 유화론자였다. 국민정부 내부에서는 사천성에 있는 장제스를 불러와 일본에 항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셌지만 왕징웨이와 허잉친은 일본에 대한 군사적 저항은 국가의 멸망을 불러올 뿐이라고 주장하며 선안내 후양외 정책을 강경히 주장했다. 이런 시점에서 무모한 즉시항일주의는 국가의 멸망을 불러일으키는 자충수에 불과하다는 것이 이들의 시각이었다. 게다가 일본은 만주사변 이후 급감한 중일 무역과 일본 제품 보이콧 운동이 국민정부의 계획적 반일운동이라 여기고 여기에 대해 '반성'을 촉구하며 위협하고 있었다. 목전에 닥친 일본의 침략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일본을 달래는 것이 급선무였고 이에 왕징웨이는 6월 10일, 문제의 돈교방목령 발표를 결정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