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일군/역사 (문단 편집) === [[냉전]] === 널리 퍼진 인식과는 달리 1949년 서독 대통령 [[테오도르 호이스]]가 절대로 군대 재창설은 없을 것이라고 공언할 정도로 전후 동서독의 전쟁 트라우마는 심대한 편이었다. 그러나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고 [[냉전]]이 격화되자 [[미국]]과 [[소련]]은 무장해제된 독일의 재무장을 승인했다. 1955년 서독이 [[NATO]]에 가입하면서 독일 군대 창설의 필요성이 확실시됬다. 동서방의 최전선인 만큼 확실한 방어막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족한 인적자원을 확충하기 위해 양군은 대거 전직 나치 독일군([[독일 국방군]]) 장교들을 영입하여 전력을 갖추게 되었다. 시작은 한개 대대 수준인 1500여명의 병력으로 창설되었다. 패전으로 부터 몇년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국내외 [[여론]]의 냉대를 받았고, 당시 영국 뉴스에서도 새로운 국방군이라고 불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NATO]]의 전신인 유럽공동방위공동체가 서독에 50만 이상의 병력을 갖출 것을 권고하는 등 국제적인 압박으로 [[사회민주당]] 등의 야권의 우려와 반대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1956년부터 전면 [[징병제]]가 서독에 도입된다. 미국 역시 서독에 [[M47 패튼]] 전차와 [[M48 전차]] 등과 군용 전투기를 공급하는 등 이를 지원한다. [[https://www.bundeswehr.de/en/about-bundeswehr/history/cold-war|#]] 동독에서는 동시기인 1956년 [[사회주의통일당]]의 주도로 국가인민군이 출범하나 징병제 도입은 1962년으로 미룬다. 서독군([[독일 연방군]] Bundeswehr)과 동독군([[국가인민군]] Nationalvolksarmee)은 각기 나토와 바르샤바 조약군의 핵심전력이었다. 외양과 군사전통의 측면에서 보면 [[68운동]] 이전에도 서독군보다 동독군이 더 독일국방군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이는 서독이 [[나치 독일]] 이전 군대의 전통과 단절을 선언한 반면 동독은 나치 독일 이전의 구 [[독일국]]과 프로이센 시대의 전통으로 회귀하려는 방향을 택했기 때문이다. [* 군대 창설과 징병제 도입만으로도 국가원수가 절대로 군대 창설은 없을 거라고 공언했던 서독에서 파란이 컸는데,프로이센 군사문화까지 유지하려고 했다면 엄청난 반발에 직면했을 것이다.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게 원칙인 구독일 군사문화가 서독군에서는 자발적인 복종 강조와 양심적 병역거부 허가 등의 온건화된 원칙으로 완전히 대체된 것도 전후 독일의 전쟁 트라우마와 염전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공산주의 동독에서는 시민사회의 반발은 공산주의 정부가 가볍게 무시할 수 있었고 동독 자체도 프로이센의 후계 국가를 자처하는 맥락이 있었기에 장교의 예복이나 소지품 등에서 구독일 전통이 상대적으로 잔존했다. ] 이는 군복이 비슷한 점 뿐만이 아니라 동독군만이 프로이센식 [[구스스텝]]을 유지한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동독군 장교 정복은 독일국방군과 너무 유사하여 냉전이 붕괴되고 나치독일 군복으로 조금 수선하여 영화 촬영이나 리인액트 소품으로 자주 사용된다. 동독군 철모는 바가지를 엎어놓은 것처럼 생겼지만, 사실 나치가 새로 도입하려던 신형 철모와 소련의 SSH철모를 합쳐서 개량한 것이다. 서독군은 만약 바르샤바 조약기구와 나토의 전면적 재래식 전쟁이 일어났을 때 '''최전방''' 을 담당하고 있던 군대였다. 초기 조약군의 제파 전술을 중추로 한 조약군의 기갑전력에 대응하기 하기위한 산물로 서독군은 기갑여단 중심의 강력한 육군을 보유했었다. 프랑스군 같은 경우는 애초부터 2선전력으로 전선유지에 투입될 예정이었고, 이탈리아군은 내부 정치적인 이유로 동원되지는 않았다. 미군과 영국군은 유럽전선에 도착하는데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덴마크-서독 유틀란트 사령부의 병력만이 1파의 동독군, 유틀란트반도를 목표로 한 폴란드군, 독일 남부를 담당하는 체코슬로바키아군, 그리고 소련군과 헝가리 등의 국가를 홀몸으로 상대해야만 했다. 이렇게 조약군의 1파 공세를 어떻게든 막아내고 나면 서독군은 재정비를 위해 예비대로 빠지고 영국, 미국, 네덜란드, 벨기에의 병력이 공군, 긴급대응군, 육상의 주전 병력의 순서로 투입되는 것으로 상정되었다. 그렇기에 서독군은 필연적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지닐 수 밖에 없었다. 이 시기의 산물이 [[PzH2000]] 자주포와 [[레오파르트 1|레오파르트]] [[레오파르트 2|시리즈 전차]], [[게파트 자주대공포]] 등 현재도 명품으로 불리는 장비들이다. 동독군도 서독군과 마찬가지로 바르샤바 조약군의 최선봉이라는 입장은 동일했으며, 나토의 진격을 '''제1선에서 저지하는 역할'''을 맡았다. 대군을 유지한 서독군과 달리 동독군은 공산권 답지않게 소수정예에 초점을 맞춰 30만명 선이었다. 서독군의 경우 소련에 비해서 종심이 짧은 서유럽을 방어해야 했기에 제파식 전술을 구사하는 바르샤바 조약군을 상대로 맞서기 위해서는 상당히 두꺼운 방어망을 구축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독의 경우 바르샤바 조약국의 핵심인 소련 영토까지 종심이 매우 길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나토군의 공세를 저지하면서 시간을 벌고, 후방에서 전열을 갖춘 30만 주동독 소련 전선군, 주헝가리 소련군 북부군과 폴란드 인민군 등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주력 부대가 제파식 전술로 반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상정되었다. 종심이 길기 때문에 밀려도 치명적이지 않다는 이점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의 기갑 전력을 상회하는 나토군의 기계화 전력과 비교가 안되는 공군 전력을 상대로 막아내야 한다는 전술적 부담 때문에 동독군은 군대 자체가 불필요하게 많은 병력을 동원하기 보다는 나토군의 강한 기동전력에 대응할 수 있는 소수정예 형태로 운용되어 기계화와 기동력에 중점을 두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