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일군/역사 (문단 편집) === 전간기 === 1차대전의 패전으로 독일제국은 해체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섰다. 전간기에는 [[베르사유 조약]]으로 군의 규모가 10만으로 제한되고, 각종 신무기, 예를 들어 잠수함, 전차, 전투기등의 보유가 금지되었다. 게다가 독일군의 두뇌역을 한 참모본부의 설치도 금지되었다. 당시 육군의 지휘자인 [[한스 폰 젝트]]는 베르사유 조약의 여러 조항들을 교묘히 피하며 군의 정예화와 첨단화를 이뤄냈다. 이를 위해서 여러가지 기만책을 실시하였는데, 참모본부와 비슷한 기능을 하지만 이름이 다른 기관을 만들고, 장교의 선발이나 교육을 강화했으며, 당시 공산정부가 세워진 [[소련]]과 비밀 조약을 맺고 소련의 철의 장막안에서 여러 무기를 시험했다. 이 교류는 히틀러 집권전까지 계속된다. 이때 전차 전술을 훈련하기 위해 자동차에 양철판이나 마분지를 씌운 모의전차로 연습한 것은 유명한 일화. 또한 공군 조종사들은 항공 스포츠 클럽으로 위장하여 훈련을 행했다. 이 시기 연합군이 개발한 [[전차]](탱크 Tank)의 운용법을 연구(당연히 보유 자체가 금지돼 있는 장비)하거나, 비밀리에 신무기 개발(예를 들자면 포병 사거리 제한 규정을 피하기 위한 '''장거리 로켓병기의 개발'''을 위해 [[V2(로켓)|로켓 연구가들을 후원]]한다거나)을 하는 등 차후의 전쟁에 대한 전술 및 작전술 연구는 오히려 승전국 이상으로 충실해져 갔다. 그러나 발전을 했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지나친 열세 하에 놓인 베르사유 조약 하 독일군은 물론이고 국력이 허용하는 안정적인 수준의 군사력을 확보한다 하더라도 최종적으로는 국가를 확실히 방위할 수 없다는 결론이 1920년대 후반에 이미 나와 있었다.[* 베르사유 조약을 준수한다는 전제 하에선 폴란드에 대한 방어조차 불가능했으며, 최우선 가상적국이 될 수밖에 없었던 프랑스에 대해서는 아예 답이 없었다.] 이 때문에 결국 군은 문민통제 하에서 최소한의 자위능력 확보를 우선시하고 모든 분쟁은 정치 및 외교로 해결해야 한다는 의견이 당시의 군 상층부에서 나왔으나, 이는 소수 의견으로 그쳤다.[* 특히 이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실무를 맡았던 슐라이허는 1934년 돌격대 숙청과 동시에 다른 반나치 인사 상당수와 마찬가지로 자택에서 나치의 정치테러를 당해 죽었고, 이에 대해 독일군 장교단은 자군의 유력한 장성이 백색테러로 살해당했다는 사실에 침묵함으로서 독일 국가에 대한 군부의 주도권을 부정하려 했던 내부의 배신자에게 간접적으로 복수했다. 단, 슐라이허는 일시적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총리를 지낸 적도 있었으며 나치와 협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제외하면 도리어 당시 독일군 내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정치군인이기도 했으므로, 어떤 의미로는 '''나치를 지지한 얼간이들보다 더 악질이라고 볼 여지도 있다.'''] 즉 독일군, 특히 육군은 1차 세계대전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주도하는 유럽의 질서 재편'''과 이를 주도할 '''독일 육군의 영광'''에 여전히 매달려 있었다. 이런 망상에 가까운 발상은 결국 예전부터 정치적 센스가 형편없었던 독일군의 전통과 절묘하게 결합, '''히틀러를 자기들이 제어할 수 있다고 착각함으로서 결국 전 세계에 [[헬게이트]]를 여는 단초'''가 되고 말았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히틀러가 등장한 후 독일군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재건되었으나, 1919년부터 1933년까지의 군사적 공백기간은 2차 세계대전 패전 때까지 독일군에게 상당한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했다. 1차 세계대전 종전 때까지 전문적인 군사 교육을 받은 장교단은 단 4천 명만이 현직을 유지했고, 이 수치는 사실상 10만 명의 육군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수치였다. 이 때문에 독일군은 고질적인 장교 부족에 시달렸다. 장교만이 아니라 훈련된 예비역 병사도 부족해서, 당시 독일이 전시 동원 가능하다고 판단되던 총 남성 인구의 3/4가 일체의 군사훈련 경험이 없는 이른바 백색년생이었을 정도였다. 이런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은 적어도 10년 이상의 시간을 들여 예비군을 재구축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 히틀러 집권 이후 창설된 독일 공군은 수장 괴링의 정치적 위치와 욕망 덕분에 빠르게 발전하였으나[* 나중의 삽질을 생각하면 의외지만 이 당시만 하더라도 괴링의 능력은 나쁘지 않았다. 생존한 독일 에이스들도 이 당시의 괴링에 대해서는 나쁘지 않게 보는 경우가 많다. 괴링이 본격적으로 삽질을 시작한건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패배한 이후이다. 당시 육군은 공군을 가리켜 "당(黨)의 공군"이라 부르며 비웃었다.] 지나치게 육구 출신 장성들의 영향을 방치한 탓에 전술공군으로서의 임무에 특화[* 실제로 전략폭격에 이용되는 4발 중폭격기를 보유하지 않았다. 전략공군 개념은 주로 해군국에서 발달했으며 독일 공군의 경우 1차 세계대전 때 이미 전략공군을 운용해 보았으나 그 성과가 미미하다는 것을 절감한 데 이어 [[스페인 내전]] 참전경험으로 전략공군이 무용지물이라고 '''착각'''했다. 물론 실제로도 전략공군의 가치는 압도적 물량 우위 하에서만 의미가 있으며 독일은 그런 산업능력이 없었지만, 적어도 2차 세계대전 초기에는 아직 가능성이 있었다. 이것이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가장 큰 원인이라는 견해도 있다. 사실 전쟁 초기 영국군의 전략폭격이 대부분 실패로 돌아간 것을 보면 신뢰가 안 갈 만도 하다.]되어 훗날 2차 세계대전 패전의 원인 중 하나를 제공했다. 이에는 육군 소속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를 보낸 육군 장교들이 독일 공군 창군 멤버가 되어 수뇌부 자리를 장악하고 있었던 탓도 컸고,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육군에 의한 공군 운용개념 연구 역시 1차 세계대전 당시 정립된 전술공군 개념에 얽매여 있었던 것도 함께 작용했다. 해군 역시 에리히 레더 제독의 지휘 아래 빌헬름 2세가 꿈꾸었던 대양 함대를 꿈꾸며 Z 계획을 실시하였다. 이를 위해 영국과 주력함 비율을 100:35로 제한하는 협정까지 맺었지만 베르사유 조약 무효화 이후 본격적인 발전의 가속도가 붙기도 전에 바로 전쟁에 돌입하는 바람에 대양함대(Hochseeflotte)의 꿈을 접어야 했다.[* 당시 해군이 생각하고 있던 개전 시점은 45년 정도로 그때정도는 돼야 프랑스, 영국등과 붙어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1942년 시점에선 통상파괴를 중심으로 해서 제한적인 함대결전도 시도 가능한 해군력 구축이 가능하다고 판단했으나,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전간기의 독일군은 1919~1933년까지의 조약 시기 규제로 인해 약체화될 대로 약체화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차 세계대전 이전의 특권계급적인 위치 및 당시 독일 특유의 민족주의적 사고방식, 아울러 '''형편없는 정치적 센스'''의 절묘한 화학작용을 통해 전 유럽의 패자로서의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수준의 목적의식을 가진 채 히틀러의 집권을 맞았고, '''자신들의 능력이라면 히틀러를 잘 제어해서 한 15~20년쯤 꾸준히 준비를 한 끝에 세계대전을 일으켜 [[세계정복]]은 몰라도 유럽 정복은 할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제프리 메가기의 "히틀러 최고사령부:1933~1945(김홍래 역)"이 매우 잘 정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군사적 역량은 국력에 비해 충분치 않았고, 그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장기 전략을 수립할 능력 자체가 부재[* 원래부터 독일군 자체가 전략적 기획력 자체가 부족한 체질이었던데다, 이의 실무를 완성할 전문 참모장교단조차 확보하지 못한 채 개전을 맞았고, 종전 때까지 이 문제는 계속해서 악화되기만 했다.]한 상태에서 자신들이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정치지도자에게 거꾸로 이리저리 휘둘린 끝에 결국은 [[제2차 세계대전|자신들의 사형 판결문에 자기 피로 사인하는 바보짓]]을 하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