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일군/역사 (문단 편집) === 근대 === 실질적인 독일 강군의 신화는 독일이라는 전체지역이라기 보다는 18세기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대왕|프리드리히 2세]](프리드리히 대왕)의 군사 개혁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프리드리히의 군대는 이후 근세 유럽국가의 모델이 되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은 지나치게 적을 만들어둔 나머지 [[7년전쟁]]에서 [[오스트리아]]-[[러시아]]-[[프랑스]]- 작센- 스웨덴 연합군을 상대로 초반에는 기가막힌 기동술로 각개격파하는가 싶었지만 다구리 앞에 장사없다고 나라가 사면초가도 모잘라서 오면초가를 스스로 자초하는 전략적 악수를 두는데 예카테리나 여제가 사망하고 독빠로 유명한 표트르 3세가 즉위해 전쟁에서 이탈하면서 기사회생, 오스트리아를 쳐발라버리고 위기에서 탈출한다. 프리드리히 대왕시절 프로이센군은 병력의 규모에선 프랑스 러시아에 뒤지지만 병력의 질은 최강이었다. 특히나 혹독한 훈련으로 사격 속도가 빨라서 다른나라 군은 숙련된 병사가 1분에 2번정도 였지만 프로이센군은 1분에 3번씩 사격할 정도로 단련을 시켜놨기 때문에 적은 병력으로도 많은 수의 적군을 물리치는것이 가능했다. 또한 종대 횡대 전환과 행군능력도 다른 나라 군대에 비해 혹독한 훈련으로 단련시켜놨기에 비슷한수 또는 그보다 많은수의 적군을 빠른 기동으로 격파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왕이면서 장군인 탓에 명령체계가 간소했고 군제면에서도 포병과 기병대의 운용에 다른나라에 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시절 부터 프로이센 군대 하면 유럽에서 최정예로 꼽히게 된다. 이후 [[나폴레옹 전쟁]]에서는 프랑스에게 연전연패하며 라인강 유역의 영토를 깡그리 빼앗기는 등 완벽하게 패배했다. 1806년 10월 8일 발발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로이센은 예나 전투와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완패하며 전쟁 발발 6일만에 정규군을 거의 몽땅 상실하고 전쟁 발발 2주하고 하루가 지난 23일에는 베를린을 나폴레옹에게 내주는 굴욕을 겪으며 틸지트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는 프랑스군에게 절대 밀리지 않는다고 자부했던 프로이센군에게 엄청난 충격을 추었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 샤른호르스트는 러시아 원정 실패이후 패주하는 프랑스군을 습격했다가 전사하며 라이프치히 전투와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자신이 개혁한 프로이센군이 이기는 것을 보지 못했다.]의 개혁으로 [[장군참모]] 신설, 장교단에 부르주아나 평민을 받아들이고 프랑스를 모방하여 징병제를 실시하면서 군을 재건한 끝에 결국 1813년부터 해방전쟁에 돌입하여 1815년 [[블뤼허]] 원수 등의 지휘하에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군]]과 힘을 합쳐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게 승리한다.[* 프랑스군의 장점으로 나폴레옹같은 전투의 사기 천재도 있지만 원래도 전통적으로 육군 강국인데는 유럽최대 인구와 경제력으로 상비군 규모에선 최강이었다가 한술 더떠 혁명으로 20대 전체 연령을 징집하는 징병제 역할도 컸다. 나폴레옹 등장전에 1793년 라자르 카르노가 의용군을 기존상비군(30만)과 합쳐 혁명군은 75만을 징집하는데 프로이센이나 오스트리아는 상비군이 20만 정도였다.] 물론 다른 나라도 --폭도들 하는짓 우리도 따라해야하냐란--논란끝에 따라하면서 비교우위는 무너진다. 한편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나서 프로이센 등지에선 다시 상비군으로 돌아가는데 전통적인 국왕에 충성하는 군대와 달리 새로운 병력에 불순세력(?)들이 군에 침투할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개혁으로 먼저 18세기 프리드리히 대왕시절 부터 장수한 [[똥별]]들을 대거 퇴역시키고 징병제를 실시하는데 이는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다른나라 군대도 마찬가지였지만 다른 중요한 개혁 내용으로는 [[장군참모|육군 일반 참모부]], 후에 독일군의 핵심역량이라 불리우는 참모체계가 이때부터 시작되며 후에 독일군의 지휘방식으로 유명한 [[임무형 전술]](Auftragstaktik)의 기반이 이때에 닦였다. 이전 까지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엄명으로 장교단에서 [[부르주아]] 출신들이 배제 되었지만[* 국왕보다는 돈에 충성하는 천박한 장사꾼들이란 고정관념과 토지귀족과 거주민이라는 프로이센 군제와 충돌되는 여러 어른의 사정 때문... 실제론 귀족 자제들만으로 장교수요를 채우기 어려웠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한적으로는 받아들였다.] 이러한 제한이 철폐되고[* 샤른 호르스트, 클라우제비츠도 원래는 평민 출신이었다.] 이후 육군 일반 참모부는 프로이센의 장교중에 핵심 두뇌 인력들이 소수정예로 교육받아 프로이센(독일)군이 이후 2차대전까지 군사강국으로 군림하는데 기반이 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뛰어난 능력 덕분에 군의 전반적인 작전을 정치나 외교상의 문제에서 '행동의 자유'를 보장 받기 이르러 군국주의화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은 프로이센 이후 [[독일 제국]]이 군국주의 사회였다는것을 부정하기도 한다. 오히려 군에서는 소수정예와 효율성을 내세워서 육군의 규모가 인구가 3분의 2에 불과한 프랑스(60만)보다 더 적은 (55만)에 불과했다는점을 들기도 하는데 전반적으로 나라에서 군의 위치가 특별하고 국민들도 선호하는 대상이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물론 경쟁국인 프랑스에서 군대란 사회적 지위도 낮고 장교라고 해도 사회적 보상이 적었다.] 이후 [[보불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군을 섬멸하며 황제를 포로로 잡고,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함락하는 등 대승을 거둠으로써 강군의 이미지를 굳히고, 전쟁에서의 승리로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 제국을 탄생시키게 된다. [[헬무트 폰 몰트케]]로 대표되는 육군 참모부의 효율성과 능력이 또 다시 확인되고 유럽 각국은 물론 미국 일본에서 까지 프로이센(독일)육군을 연구하고 참모 체계를 모방하는 계기가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