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립군/한국 (문단 편집) == 약사(略史)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FB_IMG_1474743198918.jpg|width=100%]]}}}|| || [[중국]]에서 독립군 가족 기념 사진, 연대 미상[* 사진 속 독립군들이 중산복과 오스트리아식 야전모를 착용하고 있고, [[태극기]]와 함께 [[청천백일만지홍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는 시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 [[한국]]에서 독립군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 것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각 지방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항일(抗日) [[의병]]이나, 기원을 논한다면 1895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일어났던 을미의병부터일 듯하다. 그 의기(義氣)는 장하였으나 그 출신들이 민중, 혹은 구식 군대(대표적으로 훈련도감 출신) 출신자임에 따라 제대로 훈련되어 있지 않았고 장비 또한 열악했다. 하지만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군]]이 일제에 의해 해산되고 시위 1연대 1대대원, 시위 2연대 1대대원 합계 1,200명이 이에 반하여 [[서울]]에서 시가전을 벌이고 각 지방 진위대들이 봉기하였으나 실패함에 따라 구(舊) [[대한제국]] 군인 출신들이 의병에 합류하게 되면서 체계화되었다. 물론 많은 수의 시위대원과 진위대원들이 일제의 은사금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일제의 은사금은 항일의병만이 아니라 전국 각지의 양반들도 받았다. 그 이유는 항일의병을 조직할 수 있는 실질적 주체들인 양반 집단을 회유하는데 있었으니, 여기서 은사금의 목적을 알 수 있다] 적지 않은 구 군인들이 의병에 참여함에 따라 본격적으로 [[일본군]]과 교전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의병 연합체인 [[13도 창의군]] 결성으로 인하여 그 군세가 전성을 맞이하였으나 여러 사정에 의해 실패한 뼈아픈 사실도 있다. 이때까지는 의병(義兵)이라 하여 [[임진왜란]] 당시부터의 근왕(勤王)의 기치를 내세웠었다. 대표적인 단체로 [[안중근]] 의사가 몸담고 있던 대한의군(大韓義軍)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투쟁도 헛되이 1910년 [[한일병탄조약]]에 의하여 국권이 피탈되자 이 의병들은 차츰 그 본거지를 [[만주]]로 옮겨갔다. 그 이유로는 첫째로, 국내에서는 일제의 단속이 심화되어 병합 직전인 1909년에 일제의 [[남한 대토벌 작전]] 같은 재앙이 닥쳤지만 만주는 당시 중국의 치안이 제대로 미치지 못했다. 둘째로, 만주는 외국 영토여서 일제의 단속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였다. 셋째로, 국내와 가장 가깝고 동포들이 가장 많이 이주한 곳이었고, 넷째는 [[의병]] 활동을 둘러싸고 지휘 체계 상의 혼란이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지휘 체계 상의 혼란이라 함은 의병장 중에 [[양반]]이 아닌 의병장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신돌석]], [[홍범도]] 같은 인물들은 출신상 양반은 아니었으나 양반 출신 의병장들보다 명성과 전과에서 낮지 않았다. 좁은 의미의 독립군은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중국, 만주, 연해주 지역으로 이동하여 조직적 무장 저항 운동을 벌였던 단체들로 한정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국내에 잔류한 의병 세력은 1915년까지 미약하게나마 활동을 이어간다. 의병의 시대와 독립군의 시대는 약간 겹치는 셈이다. 마지막 의병 부대에 관해서는 [[채응언]] 참고] 만주와 조선 후기부터 조선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했었던 [[연해주]] 지역을 근거지로 삼아 독립군은 [[신흥무관학교]]로 대표되는 장교 육성기관을 설치하여 독립군 간부를 육성하였고[* 대개의 교육과정이나 서적에서 청산리 전투나 봉오동 전투에 집중하느라 이 때를 어물어물 넘기기도 하는데, 사실 '''1910년대는 한국 독립군의 최전성기로''', [[대한광복군정부]]의 군사 규모는 '''3만''', 훈련중이었던 한인은 '''수십만'''이었다.],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후 격화된 만주에서의 무장투쟁은 1920년 [[홍범도]]의 [[봉오동 전투]], [[김좌진]]의 [[청산리 전투]] 등을 통해서 꾸준한 성과를 이루었다. 하지만 [[일본군]]보다 무기와 화력에서 열세인 탓에 게릴라전으로 나가야했다. 무엇보다 독립군은 통합된 지휘체계가 부재하다보니 수많은 무장단체들로 나뉘어서 투쟁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일본군이 간도 조선인 토벌 계획을 세워 독립군의 기초인 만주의 한인들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우며 독립군의 기반을 박살내기 시작하자[* 사실 저 토벌계획이 세워진 건 청산리 전투 이전이었다. 즉, 일본군은 청산리와 일절 상관없이 원래부터 간도 조선인들을 짓밟으려 했던 것이고 청산리 전투는 그러한 토벌 움직임 속에서 성공적으로 전력을 온존할 수 있게 해주었지만 그 과정에서 간도에 있던 기반들이 박살나 버린 것이다.]어쩔 수 없이 근거지를 [[러시아]] [[연해주]]로 옮길 수밖에 없었고 이 과정에서 [[자유시 참변]]이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블라디미르 레닌]]은 약소 민족 지원이라는 새 [[러시아]]의 정책을 반영해 독립군의 항일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독립군 군자금은 당시 돈 50만 달러를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군자금의 용도를 둘러싸고 독립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이의 갈등을 빚게 되었으며, [[이승만]]의 가짜 명함 사건과 결부되어 결국 [[이동휘]]를 비롯한 무장투쟁파가 [[상해임시정부]]와 결별하게 된다. 무장투쟁파가 [[상해임시정부]]를 떠나게 되고 [[태평양 전쟁]] 말이 되어서야 이범석과 지청천이 겨우 [[광복군]]을 조직하게 되어 물리적 투쟁능력을 얻게 되나 이마저도 [[미군]]에서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김구]] 선생은 일본이 투항하자 오히려 눈물을 흘렸던 것. 결국 이 때문에 한국은 독립 과정에서 전혀 임시정부가 힘을 못 쓰고 [[미국]]과 [[소련]]이라는 또 다른 외세들에 의해 분할되어 지금에 이른다. 패전국인 [[일본]], [[독일]]이야 당연히 [[미국]] 등 연합국에게 점령당해 군정을 받았지만, [[한국]]의 경우 패전국의 [[식민지]]였고 대대급도 제대로 구성 못할 소규모 전투인력을 보유한 [[독립운동]] 세력은 연합군의 일원도 아니라서 어쩔 수 없었다. [[중화민국]]이 엄연히 살아있었고 [[팔로군]]도 [[중일전쟁]] 때 교전 세력으로 인정받은 [[중국]]과 다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20년대 무장 독립 투쟁.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30년대 무장 독립 투쟁.jpg|width=100%]]}}} || || {{{-1 '''▲ 1920년대 무장 독립 투쟁'''}}} || {{{-1 '''▲ 1930년대 무장 독립 투쟁'''}}} || 아무튼 1923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의하여 임시정부 주만 참의부가 독립군 단체 연합체로 창설되었으며 이외에 통의부, 정의부 등이 각각 설치되어 만주에서의 투쟁은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룩하며 계속 이어진다. 임시정부는 흩어진 독립군을 점차 하나로 통합하고 대외적으로 독립군이라는 하나의 단체로 인식시켰으며 각국의 명령권에서 독립군을 보호했다. 중국 등지에서 활동하는 독립군이 타국의 명령에 복종하는 일개 병사가 아니라 명령을 거부할수도 있는 '타국의 병사'로서 움직이는 데 임시정부가 큰영향을 주었다. 투쟁은 주로 낮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내려와서 기습을 했다. [[일본]]의 주재소를 공격해 일본 공무원과 [[일본제국 경찰]]들을 죽이고 행정망을 무력화시키거나 [[일본군]] 초소를 공격하여 일본군을 사살하곤 했다. 이는 일본의 심각한 골칫거리였다. 무엇보다 독립군 무장단체들의 일원인 대한신민군과 대한북로독군부가 합동작전으로 [[함경북도]]에 주둔하던 일본군을 기습공격해서 많은 수를 사살하고 격퇴하고자 출동한 일본군을 [[역관광]]시켜 후퇴하게 만드는 사건이 터지자 일본을 제대로 빡치게 만들었다. 이외에도 독립군이 계속해서 [[일본군]]을 공격해서 도발하자, 마침내 빡돈 [[일본 제국]]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토벌을 결심한다. 물론 [[중국]] 땅인 [[만주]]에서 활동할 구실을 만들고 싶어 일부러 마적단을 시켜 일본 민간인들을 죽게 한 '훈춘 사건'을 만들어, 이를 구실로 만주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해 독립군에 대한 토벌을 시작했다.[* 다만 최근에는 이 사건 조작 여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시선들도 많으며 실제로 당시 중국 자료나 독립운동가 이범석의 증언 등에서도 일본군의 조작은 아니라고 하는 내용이 있어 이 사건을 진짜 일본군이 조작했는지는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독립군과 일본군의 전투는 굉장히 치열했다. 특히 지형지물에 의존하며 게릴라전으로 나오는 독립군을 상대하는 게 일본군으로서도 쉬운 게 아니라서, 상당한 사상자를 냈다. 한편으로 임정 산하 [[한인애국단]] 소속으로 [[1932년]] [[히로히토]] 천황 폭살 미수사건을 일으킨 [[이봉창]] 의사, 훙커우 공원 의거를 일으킨 [[윤봉길]] 의사 등도 역시 독립군 활동에 포함시킨다면 30년대의 투쟁 횟수와 성과 역시도 그다지 낮게 평가할 수는 없다. 이들의 투쟁이 없었다면 한국의 [[광복]]은 참으로 지난(至難)하였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