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립군/한국 (문단 편집) == 독립군의 의의 및 한계 == 몇몇 사람들은 광복군이 곧 한반도로 진격할 것이었고 자주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 무장이나 규모등으로 보았을때 일제를 직접적으로 몰아낼 힘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수백만 단위의 군대를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 굴려댄 일제와 달리 독립군의 규모는 초기엔 많아야 천 명 단위,[* [[대한광복군정부]]에게는 3만의 전력이 있었으나 일본과 동맹을 맺은 [[러시아 제국]]의 방해로 1년 만에 강제로 해산당하면서 실질적으로 써먹지는 못했으며, 오히려 대한광복군정부가 와해되면서 대규모 군 집단 존재의 의의까지 회의감을 느끼는 이들이 다수 생겨나기도 했다.] 후기에도 수천 명 이상을 넘지 못했으며, 단위당 전투력은 더더욱 차이가 났다. 이 때문에 독립군의 투쟁은 말그대로 처절했다.[* 독립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학철(1916)]]은 인터뷰에서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의 결과는 과장이며 실제 독립군은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열에 아홉은 패배했고 일본군 서너명을 사살한 것이 대전과였다고 한다. 청산리와 봉오동에서도 다수의 일본군을 사살했다는 사실 자체에는 문제가 없지만, 산악전 특성상 사상자를 정확히 추산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한국 측에서는 최대치를 공식적 자료로 취급하고 있어 문제로 지적받는다.] 그럼에도 이런 규모나 총체적 성과에 대한 교육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일시적인 성과만 언급하는 방식으로 독립운동에 대해 교육하다보니 실제 독립군의 성과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어려워지는 원인이 된다. 사실 독립군의 의의는 이런 군사적 성과가 아닌 '''정치, 외교적 성과'''에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독립군의 활동이 성과를 직접적으로 내지는 못했더라도 이들의 존재가 직접적으로 연계하고 있던 중화민국에, 그리고 서구 열강에 지속적으로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를 전달하여 끝내 일제 패망 후 한국의 독립을 이끌어낸 원인이라는 것이 이들의 진정한 존재 의의인 셈이다. 2차 대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던 1943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카이로 회담은 특별조항에서 한반도의 독립, 해방을 언급한바 있다. 이는 중화민국 총통인 장제스가 미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건의한 것으로 실제로 장제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일본은 1914년에 발발한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식민지만을 반환하고 1910년 병합한 한반도에 대해서는 통치를 계속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장제스가 이런 건의를 한 이유는 많은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이 만주 그리고 중국 본토와 연해주에서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한 결과이다. 실제 독립 이후에도 미국을 포함한 서구 열강들의 한반도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가 심하게 부족했던 사실을 생각하면, 이러한 독립운동조차 이뤄지지 않았다면 일제가 패망한 후에도 그 고유 영토로 인정받아 독립을 이루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한국과 비슷하게 일본에게 강제 병합된 류큐(오키나와현)는 아예 독립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자발적으로 일본으로의 복귀를 선택했고, 홋카이도의 아이누나 타이완 주민들(오스트로계 원주민과 한족계 본성인 모두)은 아예 하나의 공동체로도 인정받지 못했다. 독립에 스스로의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반례.] 이들의 투쟁이 조국의 [[8.15 광복]]을 직접 이룩하지 못했을지라도, 그들의 전투와 순국은 "우리는 일본의 지배를 원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다른 나라들에 확실히 심어주었다. 비록 일본이 연합국의 적국으로서 패망하였기 때문에 한국이 다행히 [[식민지]]에서 풀려났으나, 이마저도 없었다면 한 번이라도 돌아볼 나라들조차 없었을 테니까. 이들의 이러한 노력과 [[윤봉길]] 의사 등의 의거로 인해 중국의 장제스는 한국의 독립 요구를 카이로 선언에 끼워넣었고, 중국이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며 2차대전의 주요 승전국 중 하나가 된 후, 한국은 일본에게 협력하는 영토가 아닌 식민 피지배국으로 인식되어 해방을 맞게 되었다. 어쨌든 일본이 점령하던 곳이라 미국과 러시아 등 연합국의 군정이 이어지긴 했지만, 확실한 독립을 얻을 수 있었다. 독립군이 국군의 주력, 중추세력이 되지는 못했지만 어쨌거나 이들의 존재는 국군이 독립군/광복군-국군의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물론 [[대한민국 국군/문제점]]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실제로 많은 일본군/만주군 출신들이 국군에 들어가서 주류 세력을 형성했고 이들로부터 구일본군의 가혹한 병영문화, 비합리적인 군 조직 문화가 그대로 계승되기는 했으나, 그렇다 해도 그 수뇌부를 독립운동가들이 차지했다는 점은 분명히 식민지배국 출신만으로 군이 구성되는 것보다는 월등히 나은 일이다. 대표적으로 유동열은 초대 통위부장, 송호성은 초대 육군총사령관, [[손원일]]은 초대 해군총참모장을 거쳐 국방장관을 지냈고, [[이범석]]은 초대 국방장관, [[최용덕]]은 초대 국방차관이었으며, [[김홍일(군인)|김홍일]]은 육군사관학교장, 참모학교장을 거쳐 위기의 순간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이끌고 초대 1군단장이 되었다. 독립군의 숫적, 경험적 한계로 인해 국군에서 큰 활약을 하기는 힘들었지만 적어도 국군=일본군이라는 등식을 내세워 정통성을 주장하려던 북한의 전략은 초장부터 꼬일 수밖에 없었다. 신생 대한민국을 누란지위에서 구해낸 김홍일이나 해군, 공군 건설에 전력을 다한 손원일, 최용덕 같은 사례를 보면 단순히 상징성 만으로 넘어갈 수준도 아니다.[* 손원일은 엄밀히 말해 '독립군'으로 복무하지는 않았으나 독립운동에는 가담했고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이지만 일제강점기 좌우익으로 분열되었던 독립군은 해방 이후 한반도로 들어오면서 격렬한 좌우익 대립의 씨앗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독립군의 [[흑역사]]도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해방 전 벌어진 [[빈주 사건]]이라든가[* 비단 빈주 사건이 아니더라도 [[자유시 참변]] 문서에서 보듯 몇몇 독립군들이 무고한 농민들을 상대로 약탈을 자행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군대란 것이 본래 생산활동과는 거리가 먼 존재인지라 활동 자금이 떨어진 군대는 자금 확보의 가장 쉬운 방법으로 자연스럽게 총부리를 무고한 지역민에게 돌리는 길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해방 이후 독립군 출신 정치인들이 친일세력을 오히려 등용한 것이 그 예시.[* 대표적으로 [[김구]]가 있다. 정치판에서 지원세력과 자금 등이 부족했기 때문에 해방 전과 달리 친일파 청산에 소극적이고 친일 인사를 등용하는 등 모순된 행보를 보였다. 당장 [[경교장]] 제공자가 친일 기업인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