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도/역사 (문단 편집) === 15세기: 삼봉도 오류 === 삼봉도라는 이름은 독도가 한국에서 불려온 여러 이름 중 하나로 등장하지만,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오히려 한국이 타격을 입는다.--???--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전에 전교(傳敎)를 받으니, ‘강원도의 해중에 삼봉도(三峯島)가 있는데, 오는 임진년169) 봄에 사람을 보내어 찾겠으니, 그 절목(節目)을 상의하여 아뢰라.’ 하였으므로, 이제 행해야 할 사건을 조목으로 기록하여 아룁니다. >─ 『성종실록』 3년 2월 3일 경오 3번째 기사 세종때(2건)처음 언급된 삼봉도는 동해에 있는 섬으로써 부역을 피한 이들이 도망친 곳으로 묘사되었다. 이 문제는 성종때 재 부각되었는데, 실록에 기록된 건수만 '''42건'''으로, 총 45번 등장한 삼봉도 서술의 90%이상을 차지한다.[* 삼봉도라는 이름의 한자는 크게 3가지로 나뉘는데, 그냥 글자만 바뀐 것이지 같은 섬으로 유추된다. 동일인물이 발견하거나 위치가 비슷하게 묘사되는 등, 서술이 이어지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때 삼봉도에 대한 서술은 다음과 같다. >영안도 관찰사(永安道觀察使) 이계손(李繼孫)에게 하서(下書)하기를, "이제 아뢴 바를 다 알았다. 그 삼봉도(三峯島)에 투왕(投往)한 자는 부세(賦稅)를 피하고 나라를 배반하였으므로 정범(情犯)807) 이 심히 악하니... >─ 『성종실록』 1년 12월 11일 갑인 4번째 기사 >영안도 관찰사(永安道觀察使) 정난종(鄭蘭宗)에게 유시하기를, > >"김한경(金漢京)의 말이, ‘경흥(慶興)에서는 청명(淸明)한 날이면 삼봉도(三峯島)를 바라볼 수 있는데, 회령(會寧)에서 동쪽으로 배를 타고 이레 밤낮을 항해하여 도착하고, 북쪽으로 나흘 밤낮을 항해하여 돌아왔습니다. > >─ 『성종실록』 4년 1월 9일 경자 2번째 기사 양강도 경흥은 지금의 [[함경북도]]에 위치한 [[경흥군]]이다. 당연히 근처 동해 바다에 보이는 섬은 없다. 독도에는 당연히 사람도 못 산다. 함경북도에서 배를 타고 동쪽으로 가야 한다는 점에서 삼봉도는 [[홋카이도]]나 [[사할린 섬]]일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근대 지리학 발전 이전에는 전 세계적으로도 종종 서술되던, 상상의 섬이었을 가능성도 높다. 때문에 묘사되는 바에서도 삼봉도는 천여명이 거주하는 거대한 동네로 묘사되고 있다. 성종이 경각심을 가질만도 하다. 때문에 삼봉도를 담당하는 직책이 만들어지고 삼봉도는 지속적인 탐사를 보내었으나 당연히 항로를 이상하게 잡아서 보낸 선박 중 대부분은 그냥 회항하거나 표류했다. 그러다 결국 섬 하나가 발견되었다는 묘사가 등장하는데...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 >"영흥(永興) 사람 김자주(金自周)의 공초(供招)에 이르기를, ‘본도(本道)의 관찰사(觀察使)가 삼봉도(三峯島)를 찾는 일로써, 김자주와 송영로(宋永老), 그리고 전일(前日)에 갔다 온 김흥(金興)·김한경(金漢京)·이오을망(李吾乙亡) 등 12인에게 마상선(麻尙船) 5척(隻)을 주어 들여보냈는데, 지난 9월 16일에 경성(鏡城) 땅 옹구미(甕仇未)에서 배를 출발하여, 섬으로 향해 같은 날 부령(富寧) 땅 청암(靑巖)에 도착하여 자고, 17일에 회령(會寧) 땅 가린곶이[加隣串]에 도착하여 잤으며, 18일에는 경원(慶源) 땅 말응대(末應大)에 도착하여 잤고, 25일에 섬 서쪽 7, 8리(里) 남짓한 거리에 정박하고 바라보니, 섬 북쪽에 세 바위가 벌여 섰고, 그 다음은 작은 섬, 다음은 암석(巖石)이 벌여 섰으며, 다음은 복판 섬이고, 복판 섬 서쪽에 또 작은 섬이 있는데, 다 바닷물이 통합니다. 또 바다 섬 사이에는 인형(人形) 같은 것이 별도로 선 것이 30개나 되므로 의심이 나고 두려워서 곧바로 갈 수가 없어 섬 모양을 그려 왔습니다.’고 하였습니다. >─ 『성종실록』 7년 10월 27일 정유 2번째 기사 김한경과 그의 일당이 이 섬을 발견했다는 묘사가 적혀있다. 여기 있는 이 섬의 묘사가 사실일 경우, 해당 섬은 독도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많은데, 사람의 모습처럼 보인다는 인형 묘사가 일광욕을 즐기는 [[강치]]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 근데 문제는 이 주장은 후에 조정에서 다시는 섬을 찾지 못해 의심을 사고[* 당연하겠지만 해당 섬은 존재하지 않는 삼봉도였다. 더 찾으려 했지만 이후 발견되지 못했을 거다.], 해당 발견자를 재수색시 찾지 못하면 처형하자는 기록을 거의 마지막으로[* 영조 때 한 번 언급된 적이 있어 마지막은 아니다.] 이후 실록에는 등장이 없다. 그러나 이 기록이 진실이더라면 한국은 큰 타격을 입게 되는데. 다름 아닌 기록에 있는 독도를 삼봉도라 주장했고, 이후 재수색해도 동일한 섬을 찾지 못했다는 것은, 독도에 대해 추가적인 기록이 없으며 삼봉도를 독도라 착각, 아니면 재발견할 정도로 독도의 인식이 떨어진 상태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삼봉도가 거짓 증언이었을 경우에도, 그 방면으로 가면 독도가 나오는데 독도를 지나갔다는 언급이 없었다는 점을 미루어, 아예 독도 근처도 가지 못하고 회항하였을 가능성도 다분하다. 그렇다고 해서 삼봉도를 발견한 것이 조선 인식에 도움이 되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거짓된 발견으로 간주되어 계획 자체를 취소하기도 했고, 이후 삼봉도로 군사를 보내서 실질적인 영유권 행사 같은 활동도 하나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 해봤자 "발견"이상의 평을 주기 어렵다. 한 마디로, 삼봉도는 조선시대 독도의 영유권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아니라, 아예 '''조선이 독도를 까먹었거나 인식 자체가 없었다는''' 방증사례인 셈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