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도/역사 (문단 편집) ==== [[세종실록지리지]] ==== > 우산, [[울릉도|무릉]]의 두 섬은 (울진)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두 섬이 서로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청명한 날에는 충분히 바라볼 수 있다. > 于山、武陵二島在縣正東海中. <二島相去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 《세종실록지리지 강원도 삼척 도호부 울진현》 일본의 가와카미 겐조(川上健三)는 세종실록이 고려사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울릉도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 우산도를 착오로 집어넣었다고 주장했으나, 애초에 고려사와 세종실록은 [[김종서(조선)|김종서]]로 편찬 책임자부터가 동일인이다. 울릉도에 파견되어 주민의 쇄출을 집행한 김인우의 직함 또한 1차 쇄출(1416년)에서는 '무릉등처안무사'였다가, 3차 쇄출(1423년)에서는 '우산·무릉등처안무사'로 바뀐다. 따라서 당시 조선이 울릉도, 독도라는 두 섬을 따로 인식했음은 분명하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ulleung_geori.jpg|width=100%]]}}} || 그는 또 울릉도에서 독도를 보려면 130m 이상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울릉도는 안개가 잦고 삼림에 덮여 있으므로 오르기 힘들었다고 주장하였다. 근데 울릉도 성인봉의 높이는 무려 984m고, 울릉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마을인 나리분지만 해도 250m에 달한다. 게다가 [[고려사]]엔 1157년에 이미 명주도감창 김유립이 울릉도 정상에서 사방을 답사한 보고가 기록되어 있다. >5월 병자일 >○ 동해 가운데 있는 우릉도(羽陵島)는 옛날 주현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땅이 넓고 기름져 사람이 거주할 수 있다는 말을 왕이 듣자 명주도감창(溟州道監倉)·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김유립(金柔立)을 파견해 살펴보게 했다.[* 본래 울릉도는 [[이사부]]가 정복한 [[우산국]]에서 알 수 있듯 적지 않은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11세기 초 [[여진족]] [[해적]]의 침공을 받아 한반도로 대부분 이주하고 거의 빈 섬이 된 상태였다.] 김유립이 돌아와서, 땅이 바위투성이라 백성들이 거주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보고하자 백성을 이주시킬 계획을 포기했다. >王聞東海中, 有羽陵島, 地廣土肥, 舊有州縣, 可以居民, 遣溟州道監倉殿中內給事金柔立往視. 柔立回奏, “土多巖石, 民不可居.” 遂寢其議. >---- >'''『고려사』 권18, 세가18 [[의종(고려)|의종]] 11년(1157년)'''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24097&categoryId=49629&cid=49617|##]] ---- >본래 [[고구려]]의 우진야현(于珍也縣)【고울이군(古亐伊郡)이라고도 함】으로, 신라 [[경덕왕]]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 군(郡)으로 하였다. 고려에 들어서는 현(縣)으로 강등시키고 영(令)을 두었다. >[[울릉도]](鬱陵島)가 있다.【현(縣)의 바로 동쪽 바다 한 가운데에 있다. 신라 때 [[우산국]](于山國)이라고 불렀는데, 무릉(武陵), 혹은 우릉(羽陵)이라고도 하며 땅은 사방이 백리이다. [[지증왕]] 11년(510)에 신라에 투항했다. 태조 13년(930)에 섬사람들이 백길(白吉)과 [[토두(우산국)|토두]](土豆)를 보내 방물(方物: 특산물)을 바쳤다. 의종 11년(1157), 울릉의 땅이 넓고 토질이 비옥하여 과거에도 주·현이 있었고 백성이 거주할 만하다는 말을 왕이 듣고는 명주도감창(溟州道監倉) 김유립(金柔立)을 보내 살펴 보게 했는데 김유립이 돌아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섬 가운데 큰 산이 있으며, 산의 정상에서 동쪽으로 10,000여 보, 서쪽으로 13,000여 보, 남쪽으로 15,000여 보, 북쪽으로 8,000여 보 갈 수 있는 넓이입니다. 촌락의 터가 7곳이고, 석불(石佛), 철종(鐵鍾), 석탑(石塔)이 남아 있습니다. 시호(柴胡), 호본(蒿本), 석남초(石南草)가 많이 자라지만 바위가 많아 백성들이 살기는 불가능합니다.” 이에 따라 결국 논의는 흐지부지되었다. 일설에는 우산(于山)과 무릉(武陵)이 본래 두 개의 섬으로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기후가 청명하면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 >'''『고려사』 권58, 지제12, 지리(地理)3, 동계, 울진현'''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72936&categoryId=49630&cid=49617|##]] 다만 위의 주장과 반대되는 증거도 많은데, 대표적인게 다름아닌 '''태종실록과 세종실록'''이다. > 안무사(按撫使) 김인우(金麟雨)가 [[우산도]](于山島)에서 돌아와 토산물(土産物)인 대죽(大竹)·수우피(水牛皮)·생저(生苧)·면자(綿子)·검박목(檢樸木) 등을 바쳤다. 또 그곳의 거주민 3명을 거느리고 왔는데, 그 섬의 호수[戶]는 15구(口)요, 남녀를 합치면 86명이었다. 김인우가 갔다가 돌아올 때에, 두 번이나 태풍(颱風)을 만나서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고 했다. >'''태종실록 33권 ,17년 2월 5일 임술 3번째 기사 ''' 현재 독도의 인구는 '''12명'''이다. 식수와 먹을 것도 풍부하지 못한 독도의 자연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인데, 우산도를 86명이 사는 거대한 섬으로 묘사하였다는 점에서는 큰 무리가 있다. >우의정 한상경(韓尙敬), 육조(六曹)·대간(臺諫)에 명하여, 우산(于山)·무릉도(武陵島)의 주민[居民]을 쇄출(刷出)하는 것의 편의 여부를 의논케 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무릉(武陵)의 주민은 쇄출하지 말고, 오곡(五穀)과 농기(農器)를 주어 그 생업을 안정케 하소서. 인하여 주수(主帥)를 보내어 그들을 위무(慰撫)하고 또 토공(土貢)을 정함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공조 판서 황희(黃喜)만이 유독 불가하다 하며, "안치(安置)시키지 말고 빨리 쇄출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쇄출하는 계책이 옳다. 저 사람들은 일찍이 요역(徭役)을 피하여 편안히 살아왔다. 만약 토공(土貢)을 정하고 주수(主帥)를 둔다면 저들은 반드시 싫어할 것이니, 그들을 오래 머물러 있게 할 수 없다. 김인우(金麟雨)를 그대로 안무사(按撫使)로 삼아 도로 우산(于山)·무릉(武陵) 등지에 들어가 그곳 주민을 거느리고 육지로 나오게 함이 마땅하다." 하고, 인하여 옷[衣]·갓[笠]과 목화(木靴)를 내려 주고, 또 우산 사람 3명에게도 각기 옷 1습(襲)씩 내려 주었다.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에게 명하여 병선(兵船) 2척(隻)을 주게 하고, 도내의 수군 만호(水軍萬戶)와 천호(千戶) 중 유능한 자를 선간(選揀)하여 김인우와 같이 가도록 하였다. >'''태종실록 33권,17년 2월8일 을축 1번째 기사''' 동일하게 독도라면 사람이 살지 않아야 할 우산도에서 주민들을 쇄출하자는 주장이 나온다. >강원도 감사 유계문(柳季聞)이 아뢰기를, "무릉도(武陵島)의 우산[[]](牛山)은 토지가 비옥하고 산물도 많사오며, 동·서·남·북으로 각각 50여 리 연해(沿海)의 사면에 석벽(石壁)이 둘러 있고, 또 선척이 정박할 만한 곳도 있사오니, 청컨대, 인민을 모집하여 이를 채우고, 인하여 만호(萬戶)와 수령(守令)을 두게 되면 실로 장구지책이 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세종실록 73권, 세종 18년 윤 6월 20일 갑신 6번째 기사 ''' 여기선 더 가관인데, 독도는 당연히 돌섬이다. '''토지가 비옥하고 산물도 많은''' 그런 섬이 아니란 뜻이다. 때문에 우산이 가리키는 장소가 [[죽도]]라 주장하는 이도 적지 않다. 완전히 억지 주장은 아닌 것이 위에 있는 글을 해당 문서가 적혀 있는 "[[울진]]군", 즉 본토에서 바라보면 [[울릉도]]가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다면 일설에 한 섬으로 취급하는 것, 청명한 날에는 보인다는 묘사와 위에 적은 우산도와의 혼란도 해결이 가능하다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