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도/역사 (문단 편집) === 12세기-14세기:무릉도와 [[우산도]] === 우산국이 사라진 뒤 고려에서는 [[의종(고려)|의종]]이나 [[최충헌]]이 울릉도 개척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고, 또 국가의 통제를 피해 울릉도로 들어가 사는 사람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를 보였다. 고려 이후 들어선 조선은 잘 알려진 것처럼 극성을 부리는 왜구에 맞서고, 또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섬 지역에 대한 인구 쇄출(刷出)을 단행했다. 울릉도도 예외가 아니어서 [[태종(조선)|태종]]은 1425년(세종 7)에 김인우(金麟雨)를 무릉등처안무사로 삼고 울릉도로 들어가서 주민들을 설득하여 육지로 나오도록 조처했다. 바로 이러한 과정 속에서 기존에는 한 섬인 것처럼 인식하던 '''[[우산도]](于山島)'''와 무릉도(武陵島)가 짝을 이루어 기록되기 시작한다. >안무사 김인우가 '''우산도'''에서 돌아와 토산물인 대죽, 물소가죽, 생모시, 목화솜, 떡갈나무 등을 바쳤다. 또한 거주하던 사람 3명을 데리고 왔는데, 그 섬은 호(戶)가 무릇 15가구이고 남녀 아울러 86명이었다. 김인우가 갔다가 돌아오면서 거듭 태풍을 만나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고 했다. > ─ 『태종실록』 17년(정유) 2월 5일 3번째 기사 >쇄출하자는 주장이 옳다. 저들은 일찍이 역(役)을 피하여 편안히 살아왔다. 만약 토공(土貢)을 정하고 주수(主帥)를 둔다면 저들이 분명 싫어할 것이니 오래도록 머물러 있게 할 수 없다. 마땅히 김인우를 그대로 안무사로 삼아서 '''우산과 무릉 등지'''에 돌아 들어가 그 주민들을 이끌고 육지로 나오게 해야 할 것이다. > ─ 『태종실록』 17년(정유) 2월 8일 1번째 기사 바로 이듬해인 1417년(태종 17)에 2차 쇄출, 1423년(세종 7)에 3차 쇄출, 1438년(세종 20)에 4차 쇄출이 거듭되었고, 이와 더불어 요도(蓼島)라는 섬의 존재를 탐문하는 일이 이어지면서 조선 조정은 차츰 동해에 있는 섬들의 존재를 실사해나가게 되었다. 더욱이 본토로 쇄출된 울릉도민에 의해 울릉도에 대한 경험이 축적됨에 따라 우산도는 무릉도와는 서로 다른 두 섬으로 개념이 분리되어 나갔다. 여기에 무릉도가 오늘날의 울릉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확정되면서[* 고려 문헌에서 자주 등장하고, 울릉도가 본토에서 보인다는 점 때문에 인식 또한 높았다.] 우산도는 울릉도 외의 한 섬을 가리키는 것으로 굳어졌다. 이에 따라 쇄출을 집행하는 사람의 직함도 1차 쇄출의 '무릉등처안무사'에서 우산도와 무릉도가 나열된 '우산무릉등처안무사'로 확장되었고, 3차 쇄출 이후에는 이 가운데 무릉도가 울릉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확정되면서 4차 쇄출에서는 다시 '무릉도순심경차관'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혼동을 겪으면서 확장된 지리적 지식은 이후 편찬된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여기에 울릉도가 있다.(이 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신라 때에는 우산국이라 칭하였고, 일설에 무릉이라고 하고, 일설에 우릉이라 한다. 지방 백리이다. 지증왕 12년에 항복해 왔다. …… __일설에 '''우산과 울릉은 본래 2섬'''인데,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며,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__) > ─ [[김종서(조선)|김종서]] 등, 『고려사』「지리지」 강원도 울진현조, 1451년 문제는 고려사는 우산도-울릉도 1도설을 본설로 채택하고 2도설을 일설로 하고 있다. >__'''우산과 무릉 2섬'''이 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2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며,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__ 신라 때에는 우산국이라 칭하였고, 일설에 울릉도라 한다. 지방 백리이다. 험준함을 믿고 복종하지 않아, 지증왕 12년 이사부가……) > ─ [[김종서(조선)|김종서]]·[[정인지]] 등, 『세종실록』「지리지」 강원도 울진현조, 1454년 여기서는 2도설을 본설로 하고 1도설을 일설로 하고 있다. 가와카미 겐조는 고려사를 잘못 베낀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다만, 이 시기의 우산도가 '''독도가 아닐 가능성도''' 제기 중이다, 다름아닌 우산도에 대한 묘사 때문인데, 우산도의 묘사를 '''86명이 사는 비옥한 석벽에 둘러싸인 섬'''으로 묘사되어 있고, 당시 울릉도는 공도, 즉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기 때문이다. 90km라는 먼 거리를 '부속 도서로 취급할만한 거리'인지도 의문이다.[* 울릉도와 경상도 사이 거리가 이쯤된다. 제주도를 가로지를만한 거리로, 당연히 한반도에서는 독도를 보지 못한다.] 또한 이후 우산이라는 이름은 조선왕조에 걸쳐 등장하는 일이 굉장히 적은데, 당장 조선왕조 실록을 펼쳐서 우산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태종 3건, 세종 4건, 문종과 단종 1건, 그리고 '''고종'''1건이 나온다. 그 사이 실록에 등장한 적이 아예 없다는 뜻. 이 원인 해당 실록에 등장한 이유인 울릉도의 쇄출정책과 공도정책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이 말인 즉슨 조선 조정이 '''우산도라는 존재를 실감하지 않거나 아예 까먹은'''것이라는 의미도 된다. 공도 정책 이후 실록에 등장하는 섬은 무릉도(울릉도)가 전부인데[* 검색하면 총 40건, 세종때(15건)가장 많으나 선조, 숙종, 경종 등 역사 전반에 걸쳐 등장한다.], 만약 중요도가 있었다면 우산도 또한 올라왔겠지만 중요도 때문인지 아니면 관심을 끈 건지 아예 등장 자체를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 사이 조선이 이 섬에 대해 실질적인 영향을 했는지는 오리무중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